Today is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나의 영혼은 이미 당신의 것인데..... 당신의 행복에 웃음 지을 수 있는 것이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이오니... 나의 사랑이시여.. 나의 아픔 따윈 생각지 마시고 행복하시옵소서. 당신의 미소가 존재한다면 난 세상을 얻은 듯 행복하나이다. <1> 맑은 날엔 다들 기분이 좋다는데.... 이상하게 난 그렇지가 않다. 저밀 듯 가슴이 아파와 숨을 쉴 수 없어진다. 누군가가 그리운 것이 분명한데... 그것이 누군지 알 수가 없다. 18살이 될 때까지 사랑 한 번 해본 적 없던 나에게..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따뜻한 햇살은 소르르 내려앉지만... 나의 가슴은 점점 아파만 간다. 그래서 난 맑은 날이 싫다. 날씨 좋은 가을 날.. 수빈은 성훈과 함께 용산 가족 공원을 찾았다.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에 뜬 하얀 구름이 자꾸 누군가를 생각나게 한다. 잡고 싶어서 손을 쭉 뻗어보지만 잡히지 않는다. 대체 누굴 그리워하는 걸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수빈은 하얀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성훈의 등에 등을 기대었다. 수빈이 깊이 한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져, 성훈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친한 친구로 지내오던 수빈은 이상하게 맑은 날엔 기분이 축 쳐져서 우울한 얼굴로 돌아다니곤 했다. 모두 밝은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맑은 날, 혼자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수빈의 모습은 열외로 벗어난 듯 보였다. 기분 전환이나 시켜줄까 하고 공원에 데려왔는데 수빈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 [수빈아.] [...........] [자냐...?] [.......아니......왜.....?] [조금 있다가... 친구 올 거거든. 소개 시켜주고 싶어서.........] [아아... 그래..? 그럼... 있다.. 친구 올 때쯤... 깨워... 졸려서... 잘지도 모르겠어....] [응... 잘 자, 빈아...] 멀리서 성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꿈결처럼 흩어져버리는 목소리.... 애써 잡고 싶지 않아 그냥 앉아있었다. 성훈의 등에서 느껴지던 탄탄하던 느낌은 어느새 푹신한 느낌으로 변해버렸다. 꿈을 꾸는 중인가 보다. 시원한 박하향이 코를 간질인다. [빈아. 자..?] 성훈의 목소리와는 조금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수빈은 입을 꼭 다물었다. [이제 일어나야지, 벌써 해가 중천에 떴어.] 눈을 뜨면 그 다정한 음성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수빈은 눈을 뜨지 못했다. [오늘 나랑 호수에 가기로 했잖아.]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꾸 가슴을 꾹꾹 찌른다. 슬프고, 또... 기쁘다.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 수연의 볼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깨어질 유리라도 되는 양, 섬세하게 다루는 그 손길에 수빈은 자꾸 울고만 싶어졌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어제 너무 과격해서 화난 거야? 난 우리 빈이 예쁜 눈동자를 보고 싶은데... 끝까지 안 보여줄 생각이야?] 그의 기분 좋은 재촉에 수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면 사라질까봐, 아무 것도 없을까봐 두려워한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여전히 수빈의 눈앞에 서 있었다. 찾았다!!! 생전 처음 보는 그였지만, 누군지 알 수 없는 그였지만, 너무도 그리운 것을 찾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온통 차지해버려 수빈은 팔을 쭉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귓가에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갑자기 왜 그래?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야? 그래서 아침부터 그렇게 울상이었던 거야?] [보고 싶었어.] [나도 그래. 몇 초를 못 봐도 니가 보고 싶어.] [정말... 보고 싶었어.] [그래, 그래. 빈아...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아이를 얼레 듯 수빈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안심 시킨 그는 수빈이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수빈의 팔을 풀고 수빈의 앞에 앉았다. 짙은 고동색의 머리카락을 귀 밑까지 기른 그는 햇빛에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미남이었다. 얇은 입술이 그의 인상을 차갑게 보이게 했지만 수빈은 향한 눈빛만은 너무도 다정해 차가움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다. [무서운 꿈 꿨어?] 그가 수빈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물었다. 절레절레 수빈의 고개를 흔드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왜 그랬어?] [......너무... 그리웠었거든...] [그랬구나.] 그가 허리를 굽혀 수빈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수빈은 깜짝 놀라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뭔가 허전하다고 느꼈던 수빈은 그 허전함의 정체를 알고 나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어린아이 같은 수빈의 행동을 보며 그가 웃었다. [오늘따라 더 귀엽네.] 이불이 눈앞을 가리자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아 수빈은 이불을 조금 내려 눈을 빼꼼히 내밀었다. 그의 웃는 얼굴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수빈은 눈을 데굴데굴 굴려 침대 오른쪽에 떨어져 있는 옷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팔을 이불 밖으로 꺼내 옷을 가리켰다. [내.. 옷...] 그것이 수빈의 옷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옷은 분명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수빈이었다. 그리고 수빈의 생각은 딱 맞아떨어졌다. [여기 있어. 먼저 안 씻어? 일어나자마자 샤워하잖아.] 어떻게 생활 습관을 그리도 잘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꿈이니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수빈이었다. 수빈은 옷을 받아들고, 그가 나가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여전히 수빈이 발켠에 앉은 채 수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부끄러워져 얼굴이 빨개진 수빈이 입을 열었다. [저기.. 나... 옷 입을... 건데...] [응, 입어.] [아... 나가야 입지. 그렇게 보는데... 어떻게 입어...?] 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 그래?] [가...갑자기라니...] [원래 나 있는데서도 옷 잘 입잖아.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로...] [으응...] [나 잠깐 나간 사이에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더 이상은 그를 속일 수 없을 것 같다. 이것이 꿈이던, 현실이던 간에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수빈은 힘들게 말했다. [나.... 니가 누군지 모르겠어.] 그의 표정이 잠시 변했지만 너무 짧은 순간이라 어떤 표정을 담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뭐야, 또 날 놀리는 거야?] [.....아니야... 나 정말.. 니가 누군지 모르겠어. 정말로... 정말로 그립기는 했는데... 누군지 알 수가 없어. 사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어.] 현실 같지 않은 고풍스러운 느낌의 방을 두렵다는 듯 둘러보며 수빈이 말했다. 그의 얼굴에 난감하다는 표정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곧 웃으며 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정말 두려웠겠네. 눈을 떴는데 알 수 없는 것들만 있어서.... 그럼.. 옷 입고 있어.] 그리곤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을 쭉 펴고 일어난 그는 생각보다 훨씬 키가 커보였다. 수빈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은 그는 수빈을 방에 놔두고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그가 나간 후, 수빈은 주섬주섬 옷을 입어보려 했지만 한복과 비슷하지만 뭔가가 다른 그 옷을 입기 힘들어 인상을 찌푸렸다. 이 옷.. 어디선가 봤던 옷인데... 떠올려보려 애쓰지만 어디서 봤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침대에 앉아 방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그가 컵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흙으로 예쁘게 빚은 찻잔을 수빈에게 건넨 그는 수빈의 발치에 앉았다. [좀 마셔봐. 마음이 진정될 거야.] 그는 원래 천성이 느긋한 듯 했다. 수빈이 기억을 잃었다는데도 그의 표정엔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역시 어제 내가 너무 과격했던 모양이야.] [응?] 수빈이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린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찻잔을 받아 옆에 있던 탁자에 놓은 그는 침대 위로 올라와 수빈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수빈이 그에게서 조금 떨어지려 했지만 그의 굵직한 팔이 수빈의 어깨를 확 감싸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러고 있는 거 창피한 일이 분명한데 왠지 아주 당연한 듯 느껴져 수빈은 몸의 긴장을 풀고 편하게 그의 몸에 기대었다. 탄탄한 그의 몸에서 시원한 향기가 풍겼다. [두려워하지 마. 잊은 것은 조금씩 기억하면 되는 거고.. 기억이 나지 않는 추억은 다시 한 번 만들면 돼. 니가 내 곁에 있고, 내가 니 곁에 있으니까 다시 한 번 추억 만드는 것도 아주 재미있을 거야.] [으응..] [너의 이름은 기억나?] [한수빈..] [그래, 다행이네. 너 자신에 대한 건 다 기억나는 거야?] [그런 것 같아.] [그럼.. 니가 날 사랑한다는 것도 기억나?] 너무 자신감 있게 말하는 통에 수빈은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의 기억 속의 수빈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이 사람을 목숨처럼 사랑할 것만 같다고 생각하는 수빈이었다. 그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참 다정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그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원인 모를 불안함이 씻겨져 내려간다. [다행이다. 그것마저 잊어버렸으면 난 너무 가슴이 아팠을 거야.] [으응..] [내 이름은 우혁이야. 이우혁..] [이름... 멋있다.] 그가 웃는다. [고마워. 널 처음 만났을 때, 나의 이름을 말할 때에도 넌 그렇게 말했어. 이름 멋있다고....] [으응..] 평화롭다. 그의 곁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평화롭게 느껴졌다. [난 적휘국의 일등 공신으로 주군을 호위하고 있어. 적휘국에서 날 낮출 수 있는 건 주군과 너뿐이야.] 우혁이 부드럽게 웃으며 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빈의 머리카락이 우혁의 긴 손가락 사이로 사라락 흩어졌다. [넌 나의 공주님이니까....] 충분히 닭살스러운 말임에도 불구하고 우혁이 해서인지 너무나 당연하게만 느껴진다. [넌 마치 하늘이 내려준 선물처럼 내게 찾아왔고, 난 그 하늘의 선물을 너무 감사하게 받아들였어. 난 너에게 나의 영혼을 바쳤고, 나의 마음을 너의 발치에 깔아두었어. 나의 목숨은 주군의 것이지만... 나의 영혼은 너의 것이야.] [으응...] 그 따스한 사랑 고백에 어찌해야할지 몰라 수빈은 고개를 숙였다. [나의 주군은 나와 어렸을 적 친구였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제 그분은 한 나라의 주인이시니까....] [너의 주군과 나도 친구였어?] 우혁이 웃는다. 왠지 그 미소가 서글프다고 생각했다. [아니. 너와 주군은 친구가 아니야. 주군은 널 알지 못하셔. 그리고 난 주군께서 널 보는 걸 원치 않아.] [왜? 나쁜 사람이야?] <2> [왜? 나쁜 사람이야?] 우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주 현명하시고, 좋으신 분이셔. 이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셨고, 백성들의 고통을 굽어 살피시는 분이지.] [근데 왜...?] [그냥... 그냥 싫어, 빈아..] 우혁의 목소리에서 수빈은 알 수 없는 슬픔이 잔뜩 묻어나와 수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잠시 수빈을 끌어안고 있던 우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랑해, 빈아.] 간절함이 담긴 우혁의 목소리가 듣기 좋다. 수빈은 나른함을 느끼며 우혁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으응.. 나도....] [정말 사랑해, 빈아..] [으응.. 나도 그래, 혁아..] 원래 그래왔다는 듯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혁의 애칭이 불러진다. 우혁은 수빈을 꼭 끌어안고 천천히 숨을 쉬고 있었다. 처음엔 수빈의 머리께에 머물러 있던 우혁의 커다란 손은 천천히 수빈의 목덜미를 쓸고 내려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빈이 움찔하는 것을 느낀 우혁이 낮게 웃었다. 목에서 울리는 그 소리가 기분 좋다. 우혁은 수빈을 살며시 침대에 눕히고 수빈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마와 눈과 코에 꼼꼼히 입을 맞추던 우혁은 한 손으로 수빈의 귓불을 만지며 수빈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뜨거운 입술이 입술에 닿자 수빈은 몸을 움찔하며 두 손으로 이불을 꼭 움켜쥐었다. 수빈의 귀와 목덜미를 소중하게 어루만지던 우혁의 손이 수빈의 옷을 하나씩 끌러 내리자 수빈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무서워?] [아...아니....] 사실은 너무 무섭지만 우혁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빈이 덜덜 떠는 것을 느낀 우혁이 미소를 지으며 수빈을 품에 안았다. 우혁의 몸에 꼭 맞추기라도 한 듯 폭 안겨버린 수빈의 볼에 입을 맞추며 우혁이 말했다. [괜찮아. 무리하지 않아도 돼. 이런 거 하지 않아도 난 널 너무나 사랑하고, 니가 날 사랑한다는 거 아니까....] 우혁은 마법을 할 줄 아는 것 같다. 우혁이 말을 하면 불안하던 마음이 마법처럼 가라앉는다. 나른하다.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혁의 품속에서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참으로 맑았지만 더 이상 가슴이 아프진 않다. 오히려 기분이 좋다. 낯선 곳이지만 그다지 낯설게만 느껴지지도 않는다. 수빈은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우혁은 아직도 옆에서 자고 있었다. 새근새근 자는 모습을 보노라니, 귀엽다는 생각마저 든다. 베개에 가볍게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이마에서 보기 좋게 이어지는 코도, 어제 수빈에게 몇 번이나 입 맞추었던 그 얇은 입술도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조심스레 우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본다.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운 느낌이다. 덥썩!!!!!!!! [앗!!] 갑자기 수빈의 팔목을 잡는 우혁 때문에 수빈은 떨어질 뻔한 가슴에 손을 올리며 낮게 비명을 질렀다. 우혁이 눈을 감은 채 웃고 있었다. 흩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우혁의 이마가 보기 좋아 수빈은 문득 그의 이마를 만져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잘 잤어?] [응.] [어젯밤 일은 기억나?] [응.] [그래..] 우혁이 그대로 수빈의 팔을 끌어당겨 수빈을 품에 안았다. 그러더니 수빈을 쓰다듬으며 입술로 수빈의 입술을 찾았다. 아마도 그리 하는 것이 오래된 버릇인 것 같다. 수빈 역시 기분 나쁘지 않아 우혁이 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오늘도 이대로 나가지 말까?] 우혁은 수빈을 놓아주기 아쉽다는 듯 수빈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부비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이불이 흘러내리며 우혁의 몸이 드러나자 수빈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잠깐 동안 봤지만 햇빛에 그을린 우혁의 상체는 탄탄하게 근육 잡힌 몸이었다. 저 가슴에 안겨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새색시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는 수빈을 보며 우혁이 말했다. [꼭 끌어안고 둘이서만 있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날씨도 좋은데 집에만 있으면 손해잖아. 내일 주군이 돌아오시면 낮엔 놀 시간도 없을 테니..... 호수에 가서 놀다 오자.] 우혁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우혁을 보면 황망한 듯 얼른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우혁은 그들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거만한 태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빈은 우쭐해지는 것을 느끼며 우혁의 손을 꼭 붙잡았다. 성밖으로 보이는 산은 빨간 물감,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예쁘게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가을의 날씨가 흔히 그렇듯 굉장히 높고 푸른데, 여느 때처럼 가슴이 아프진 않다. 우혁과 있어서일까? 우혁이 손에 살짝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우혁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기분이 좋아져 버리는 수빈이다. [힘들어?] 조금 더디게 걷는 수빈을 향해 묻는다. [아니.] [업어줄까?] 우혁의 눈에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혁의 눈을 보는 것이 좋다. 그 회청색 눈동자 안에는 오직 수빈만이 가득 차 있어서 우혁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느끼게 해준다. [아니, 내가 무슨 어린앤 줄 알아!!] 수빈이 말을 할 때면 늘 우혁의 입가엔 미소가 번진다.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부드럽게 퍼지는 미소를 보면 수빈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버린다. [후후] 우혁은 가볍게 웃으며 수빈을 번쩍 안아들었다. [아앗!! 이거 놔아!! 사람들이 보잖아!!!] [내가 하는 행동을 감히 어느 누가 똑바로 쳐다보겠어.] 다른 사람이 말했더라면 너무 거만해서 한 대 때려주고 싶었을 때지만, 우혁과는 너무 잘 어울리는 자신감 가득한 말이다. 우혁은 수빈은 품에 소중히 안고는 호수로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두근.. 두근.. 두근.. 일정한 심박소리가 수빈의 귀를 자극했다. 조심스레 청각을 자극하는 그 소리를 듣노라니 긴장이 풀리며 잠이 오기 시작했다. 잠을 깨려고 노력하던 수빈은 수마의 마수를 이겨내지 못하고 우혁의 품에 안긴 채 잠이 들고 말았다.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가며 자는 수빈의 귀에 우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정말.. 이렇게 무방비해서야. 다른데 가선 이러지 마라. 빈아..] [잘 잤어?] 눈을 뜨면... 우혁이 있다. 당연히 그래야한다는 듯, 아주 오래 전부터 너무도 당연히 그래왔다는 듯... 물이 튀는 소리가 들릴 듯 새파란 하늘과 우혁이 어우러져 눈이 시리게 와 닿는다. [으응.. 꿈을 꾼 것 같아.] [그래?] 위에서 수빈을 내려다보던 우혁이 수빈의 옆에 누웠다. 싱그러운 흙내음과 우혁만의 독특한 시원한 향기가 수빈의 코끝을 간질였다. 수빈은 기분이 좋아졌다. [혁아..] [응?] 당연한 듯 들려오는 이 대답 소리에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냥... 우혁이 함께 있어서 모든 것이 기분 좋다. [하늘이 너무 예뻐.] 수빈은 하늘을 향해 팔을 쭉 뻗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하늘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래? 난 니가 더 예쁜데...?] [피이...] 장난 섞인 우혁의 칭찬이 듣기 좋아 수빈은 괜히 입을 쭉 내밀었다. [흐음... 키스하고 싶은데...?] [됐어~~] 수빈은 가까이 다가오는 우혁을 밉지 않게 밀어내며 물었다. [혁아. 넌 친구 없어?] [왜? 없을 것 같아?] [아니.. 그냥...] [있어, 아주 친한 친구가....] 그의 이야기를 하는 우혁은 좀 신난 듯 보였다. [얼굴도 잘 생기고, 아주 재미있는 친구야.] [그 친구를 아주 좋아하나봐.] [응. 정말 좋은 녀석이거든. 너도 그 애를 아주 많이 좋아해.] [그 친구는... 이름이 뭐야?] [고지훈. 호는 운사(雲師)야.] [아아.... 그 친구도 날 알아?] [당연하지. 둘이 아주 친한 걸.] [지훈...이라고 부르면 되는 거야?] [응.] [지훈이는 어디 갔어?] [주군을 모시고 선왕들의 묘에 갔어. 지훈이는 왕족이야. 주군의 친척 동생이거든.] [아.. 그렇구나. 혁아.] [응?] [너의 호는 뭐야?] [내가 말 안 했나? 내 호는... 풍사(風師)야.] [풍사....] 가만히 우혁의 호를 읊조려본다. 그러고 보니... 우혁이 웃을 땐 마치 바람이 부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예쁘다...] [그럼 호로 불러..] [싫어. 그래도 우혁이란 니 이름이 훨씬 좋아.] [그래.. 나도 너의 이름이 좋아.] 우혁이 다정하게 웃으며 수빈을 안았다. 크고, 따뜻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느낌이 기분 좋다. 귓가에 느껴지는 우혁의 숨결도 좋다. [얼른 지훈이 만나보고 싶지?] [아니.. 지금은 너만 보고 싶어...] [그래.. 빈아.. 졸려?] 아까부터 나른한 수빈의 목소리에 우혁이 물었다. [으응.. 조금...] [그래, 그럼 좀 자.] 우혁이 좀 더 꼭 수빈을 끌어안았다. 우혁의 향이 느껴지자 더 졸려진다. 아마도 이 향 때문에 자꾸 졸음이 몰려오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곁에 있다는 생각 때문에 안심이 되어서.... [으응...] 칭얼대듯 대답한 수빈은 우혁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다가 잠이 들었다. <3> 하얀 방이다. 구름 안에 있는 듯 새하얀 방... 어둡긴 하지만 하얗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파란 하늘이 보였던 것 같은데 언제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를 일이다. 수빈은 몸을 움직이다가 움찔했다. 옆엔 상의를 벗은 우혁이 한 팔을 이마에 얹은 채 잠들어 있었다. 새근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공간에 울렸다. 수빈은 손을 들어 우혁의 가슴을 만져봤다. 따뜻하고, 단단한 느낌... 그리고 손바닥에 울리는 부드러운 느낌이 좋다. [으음...] 우혁이 깬 모양이다. 우혁은 천천히 얼굴을 수빈 쪽으로 향했다. [아.. 미안, 깼어?] [아니, 이리와..] 우혁이 팔을 뻗어 수빈을 안았다. 샤워를 해서 그런지, 몸에서 부드러운 향이 느껴진다. [나 왜 여기 있어?] [너무 곤하게 자길래 안고 왔어.] [여기까지?] [응..] [으으../////////...무겁지 않았어?] [니가 뭐가 무거워..] 우혁이 웃으며 수빈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따뜻한 느낌.. 이 느낌이 좋다. [키스도 하고 싶지만.....] 우혁이 아쉽다는 듯 수빈을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줬다. [키스로만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내일은 주군을 알현하러 가야하고.... 자자, 빈아.] [으응...] 우혁의 긴 손가락은 한동안 수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어느 순간 천천히 움직임이 잦아들더니 이내 멈추고 말았다. 우혁의 고른 숨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다. 늘 이렇게 지내고 싶다.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의 따스함을 느끼며.... 그것만 있으면 부족함 없이 행복할 것만 같다. 한데... 왜 자꾸 이렇게 원인 모를 불안감이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다시는 우혁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 꿈에서 깨어나면.... 우혁을 볼 수 없다는 불안감... 그것이 공포가 되어 미적미적 다가오고 있었다. 수빈은 갑자기 오한이 느껴져 우혁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우혁이 잠시 뒤척이는 듯 하더니 수빈을 보듬어 안았다. [빈아...]라고 나른하게 중얼거리는 것은 꿈결에 그러는 것 같다. [우혁아...] 수빈이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아침에 일어났더니 우혁이 보이지 않는다. 우혁의 잔향만이 곳곳에 남아 조금 전까지 우혁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보니 오늘도 날씨가 맑은 것 같다. 우혁과 함께 있었을 땐 몰랐는데 집이 몹시도 휑뎅그렁하게 느껴진다. 아마 우혁의 존재가 이 집을 꽉 채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꼬르르르르르르 배에게 들려오는 불협화음에 수빈은 들을 사람도 없었건만 얼굴을 붉히며 배를 움켜쥐었다. [배고파..] 뭐든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수빈의 눈에 우혁이 두고 간 것으로 보이는 쪽지가 하나 들어왔다. 군데군데 황토빛이 섞인 천을 집어든 수빈은 그대로 얼어붙고 만다. . . . . . . [이럴 줄 알았으면 한자 공부 좀 할 걸.] 한자로 쓰여진 글씨를 보며 수빈이 중얼거렸다. 가득히 쓰여진 한자들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우~ 대체 무슨 말이지?] 다시 한 번 살펴보지만 역시 알 수 없는 글씨들이다. 입을 삐쭉 내밀고 쪽지를 보던 수빈의 입가에 이내 미소가 걸렸다. [우혁이는... 글씨도 잘 쓰네..] 또박또박 쓰여진 한자들의 배열이 수빈을 기분 좋게 해주었던 것이다. 꼬르르르르르 또 다시 배에서 수빈을 재촉했다. [보통.. 꿈에서도 배가 고프고 그런가?] 수빈은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우혁이 먹을 것도 챙겨두지 않고 그냥 나갔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부엌을 찾아 방을 나서던 수빈은 막 방으로 들어오던 누군가와 부딪쳐 휘청이고 말았다. 쓰러질 뻔한 수빈의 가느다란 팔목을 잡아 똑바로 세운 그는 수빈을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조심 좀 해야지.] 우혁만큼이나 까무잡잡한 그는 동글동글한 눈을 가진 귀엽게 생긴 남자였다. 우혁의 이미지를 날카롭다고 표현하자면, 그는 둥글게 깎아놓은 원만한 자갈 같아 보였다. 그는 군청색의 옷을 입고, 옆구리에 긴 칼을 장비하고 있었다. 칼의 손잡이는 붉은 보석으로 장식되어 그의 신분이 낮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싱글 웃는 그를 살피던 수빈이 입을 열었다. [저... 누구....?] 그의 표정에 잠시 의아함이 떠올랐다가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우혁이가 너 기억 잃었다고 하더니... 정말이었군. 너무 담담하게 말해서 장난인 줄 알았는데... 하긴... 우혁이가 너의 일을 가지고 장난을 칠 리가 없지.] 그가 수빈의 팔을 놓아주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살짝 허리를 굽혀 수빈에게 인사했다. 장난 반, 진심 반 섞인 그의 행동에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수빈도 어설프게 허리를 숙이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난 지훈이다, 고지훈. 수빈아. 잘 지내보자.] <4> 냠냠냠.. 쩝쩝쩝.. 맛깔스럽게도 먹는 수빈을 지훈은 여전히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지훈이 쳐다보던 말던 너무 배가 고팠던 수빈은 열심히 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배 많이 고팠나보네?] 수빈이 거의 먹어갈 때쯤에야 지훈이 입을 열었다. [으응. 어제부터 아무 것도 못 먹었거든.] 수빈이 잠깐 나무 수저를 쥔 손을 멈추며 말했다. 부엌엔 우혁이 사람을 시켜서 준비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맛있게 잘 된 하얀 쌀밥과, 나물, 고기, 국들은 냄새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예쁜 색깔의 천으로 덮여 있었다. [맛있냐?] [응. 근데 우혁인 어디 간 거야?] [주군을 알현하러 갔겠지. 주군은 늘 우혁이만 찾으니까.....] [아......그래?] [가장 능력 있는 신하잖냐. 외교 문제에 있어서도 늘 우혁이한테 먼저 물어봐. 주군껜 외람된 말이지만 적휘국의 실질적 권력은 우혁이가 잡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신하들도 우혁이라면 벌벌 기거든.] [하극상이네.] [쿠쿡 하지만 우혁이는 권력엔 별로 관심이 없어. 그저 주군의 곁에서 주군을 보필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녀석이니까.... 그 녀석 관심은 딴 데 있거든.] 지훈이 의미심상하게 말하며 수빈을 보고 웃었다. 수빈은 영문도 모르고 지훈의 웃음에 답례를 보냈다. [아참... 나 이거 못 읽겠어. 읽어줘.] 수빈이 아까 주머니에 넣어뒀던 쪽지를 꺼내 지훈에게 건넸다. 쪽지를 쭉 읽어보던 지훈의 표정이 점차 굳어간다. 지훈의 얼굴을 계속 차지하고 있던 웃음을 싹 거두어버린 지훈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이걸 나한테 읽어달라는 거냐?] [으응.. 왜?] [후우... 좋아. 읽어주지. 원한다면....] 뭔가 큰일이라도 있는 듯 심각한 목소리로 말한 지훈이 쪽지를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수빈아. 너의 잠든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한동안 너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어. 하늘의 태양도 너보다 밝게 빛날 순 없을 거야. 별보다도 맑게 빛나는 너의 눈동자를 보고 싶었지만, 지금 널 깨우는 건 신이 선사한 아름다움을 부수는 것만 같아 그만둔다. 오늘 하루 널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난 너무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네가 없는 몇 시간... 아마 난 며칠 간 사막을 여행한 사람이 오아시스를 찾듯 갈급하게 널 그릴 거야. 네가 기억을 잃은 후부터 널 안을 수 없어서 난 지금 너무 괴롭다. 하지만 네가 두려워하지 않을 때까지 난 참을 수 있어. 하지만 너의 하얀 살결이 나의 눈앞에 어른거려서 오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지우려 노력해야겠지만 나의 품에 안길 때의 넌 너무나 사랑스러워. 아마 오늘 지훈이가 집에 올 거야. 혼자 있으면 심심할 것 같아서 지훈이한테 말해놓으려고... 어차피 지훈이는 오늘 일이 없을 테니까... 둘이 즐겁게 놀고 있어. 지훈이와 옛날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즐거울 거야. 나의 사랑하는 수빈아. 아침은 식탁에 차려놓을게. 점심은 지훈이 보고 사달라고 해. 돈이 남아도는 녀석이니까... 마지막으로... 사랑해..] [......///////////////.......] [좋냐?] [.....///////...지..진짜 그런 내용이야?] [그래.-_- 이 놈은.... 정말... 남들한텐 가차 없으면서 너한테만은..... 으휴..] 지훈은 제가 읽고도 민망했는지 계속 툴툴대며 앉아있었다. 부끄럽지만 기분이 너무 좋아져 수빈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우혁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다. [혁이.. 많이 늦게 올까?] [그렇겠지. 주군께서 며칠동안 성묘하러 자리를 비우셨으니 나랏일이 좀 밀렸을 거야.] [넌 무슨 일 하는데 이렇게 펑펑 놀아?] [....-_-.... 니가 처음으로 우혁이네 오던 날.. 내가 너 챙겨주러 왔을 때 니가 한 말도 이거다. 어떻게 변한 게 없냐? 뭐.. 난 우혁이랑 비슷한 일을 해. 주군의 보좌관이지. 하지만 아무래도 난 왕족이다 보니 많이 쉬게 되는 편이야.] [아... 우혁이는 왕족 아니야?] [응. 우혁이는 일등 공신의 아들이야. 대대로 물려받고 있지. 뭐.. 물려받지 않았더라도 실력으로 올라올 놈이지만...] [응..] 수빈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지훈을 쳐다봤다. [저기.. 지훈아.] [응?] [우혁이가... 나 보고 주군이라는 사람 눈에 띄지 말랬어. 왜 그런 거야?] [아......] 지훈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다시 웃음을 찾았다. [주군과... 우혁이 난.. 셋이 친했어. 하지만.. 주군은 왕이 될 운명이었고, 우혁이는 신하가 될 운명이었지.] [근데..?] [아..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지. 주군께선 이상하게 우혁이한테 묘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어서 우혁이가 가진 것은 전부 뺏으려고 해. 주군께 워낙 절대적인 우혁이야 주군이 달라하면 그게 뭐가 됐든 군말 않고 바치지만... 너만은 빼앗기고 싶을 리가 없잖아.] [......////////////.....] 수빈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본 지훈이 낄낄댔다. [뭐.. 기억은 잃었어도 무슨 말만 하면 얼굴 빨개지는 건 똑같네.] [내.. 내가... 무슨.../////////....] [귀여워.] 지훈이 웃으며 수빈의 볼을 잡아 쭉 늘렸다. 졸지에 볼이 양쪽으로 늘려진 수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지훈을 째려봤지만 그 모습이 무섭기는커녕 더 귀여워져 자꾸 키득대는 지훈이다. [놔아~!! 아푸단 말이야!!] [푸하하하 진짜 재미있다. 니 볼은 쭉쭉 늘어나서 기분 좋아.] 재미있다는 말에 발끈한 수빈.. 기습적으로 지훈의 볼을 쭉 잡아 늘렸다. [뭐야!! 니 볼이 더 잘 늘어나잖아.] [어쭈~ 너 죽을래?] [뭐야, 뭐야!! 니가 먼저 시작했잖아.] [이게!!!! 아주 기어오르는구만. 우혁이가 버릇을 잘못 들였어.] [내가 무슨 개냐!!! 버릇을 잘못 들이게.] [그럼 니가 인간이........아야야얏!!!!] [남자가 이 정도도 못 참아? 아아아아~!!!!!] 한동안 볼이 벌개질 정도로 잡고 늘리다가 동시에 하나, 둘, 셋을 세고는 손을 놔둔 둘은 씩씩대며 서로를 노려봤다. 그러다가는 어린 아이 같은 그 장난이 우스워져 마구 웃어댔다. [근데 지훈아. 난 우혁이랑 어떻게 만났어?] [뭐야, 너... 그것도 기억 안 나냐? 제대로 기억을 잃었구나.] [흐음... 응.. 언제 만났어, 나랑 우혁인?] [한.... 2년 됐어. 2년 전 여름에....] 지훈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 . . . . . . 우혁과 지훈은 일이 끝난 후, 조금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굳이 서두를 이유는 없었지만 뭔가가 자꾸 발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국사에 관한 이야기와 백선국의 제압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이야기 하며 어두운 밤길을 걷던 그들은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벌어진 약간의 실갱이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모양새로 보아서는 거리패들이 몸집이 자그마한 여자를 희롱하는 것 같았다. 한 커다란 남자가 여자의 팔목을 잡고 있었고, 여자는 부서질 듯 그 남자의 휘두름에 따라 여기저기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 밤중에 돌아다니는 게 남자 꼬시려는 수작이 아니면 뭐란 말이야!! 유곽에서 일 할 때보다 더 잘 해줄 테니... 앙탈 부리지 말고 따라와!!] 남자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라 내에서 안 좋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우혁은 지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들의 곁에 가서 서있었다. 여자와 실갱이 하느라 지훈의 존재를 미처 눈치 채지 못한 그들은 우혁의 나직한 목소리가 공기를 울릴 때에야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뭣들 하는 짓이냐.] 차가운 목소리... 수빈을 만나기 전 우혁의 목소리는 늘 차갑기만 했었다. [아....] 그 남자는 한 눈에 우혁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옷 입을 꼴을 보아하니 귀족의 자제인 것 같다. [이 밤중에 여자를 희롱하는 모습은 보기 안 좋다.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일은 네가 누구라 할지라도 용서하지 못한다. 지금 조용히 돌아가겠느냐, 아니면 시체가 되어 돌아가겠느냐.] 어떻게 우혁의 말을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그는 죄송하다는 둥의 말을 중얼거리며 패거리들을 이끌고 얼른 그곳을 떠났다. 수빈은 울고 있었다. 좁은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모습이 애처로워 지훈은 당연히 우혁이 수빈을 위로해줄지 알았지만 지훈이 잠시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우혁은 여자 다루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여자에게나 남자에게나 똑같이 차가운 우혁이 유일하게 차갑지 않은 존재는 지훈과 우혁의 주군뿐이었다. 따뜻한 것이 아니라 그저 차갑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 우혁이 한 밤에 돌아다니다가 남자들의 희롱이나 받는 여자에게 따뜻한 말을 해줄 리는 만무했다. 역시나 우혁의 입에선 따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유곽에서 일하는 여자도 한 밤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다. 결국 남자들에겐 몸을 팔러 다니는 듯 보일 뿐이니, 너무 늦은 시간에 다니.........] 우혁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울던 수빈이 고개를 바짝 들고는 우혁의 멱살을 잡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이런 일을 당해본 적이 없는 우혁은 꽤나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고, 지훈은 그 상황이 재미있게 느껴져 웃음을 꾹 참으며 둘의 모습을 지켜봤다. 우혁이 수빈의 목을 베려 하면 얼른 말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5> [난 유곽에서 일하지 않아!!!!!!] 수빈의 청량한 목소리가 밤을 깨웠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유곽에서 일하지 않는다구!!! 어째서 내가 유곽에서 일한다는 거야!!! 밤에 돌아다니는 게 어째서 잘못이란 거야!!!] [아........] 우혁은 당황했는지, 평소엔 어떤 상황에서도 술술 내뱉던 차가운 말들을 하지도 못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빈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당신 따위의 도움 필요 없었어!!!! 어쨌든 난 돈을 벌어야 한다구!! 이 밤에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잖아!!!] 우혁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도도도도 말을 끝낸 수빈은 움켜쥐었던 멱살을 탁 놔두며 뒤돌아섰다. 하지만 수빈이 앞으로 갈 수 없었던 것은 우혁의 손이 수빈의 팔을 잡았기 때문이다. 휙 돌아서 뭐라 말하려던 수빈은 우혁의 말 때문에 자기 할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럼... 날 위해서 일해 볼래..?] 그건 지훈도 처음 듣는 우혁의 따뜻한 목소리였다. 그 후로 우혁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따뜻함이란 것을 보여주곤 했고, 수빈과 있을 때의 우혁은 봄 햇살처럼 따뜻해서, 이게 예전의 그 이우혁인가..싶을 때도 있었다. . . . . . . . . [아무튼... 그렇게 널 만났던 거지.] 지훈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옛일을 떠올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 내.. 내가... 우혁이 멱살을 잡았다구..?] [응. 얼마나 당돌하던지.... 난 우혁이가 널 베어 버릴까봐 엄청 조마조마 했다. 우혁인 그런 애거든. 가차 없는....] [으.....////////////....] [하하하하하하하. 또 얼굴 빨개졌다.] 한참을 웃어대던 지훈이 생각났다는 듯 제안했다. [시장 갈래?] [시장엔 갑자기 왜? 너 장 볼 일 있어?] [야, 야.. 이래봬도 왕족이다.-_- 장 같은 걸 볼 리가 없잖아. 니가 저번에 단도 하나 가지고 싶다고 했잖아. 기억을 잃게 된 기념으로 내가 하나 사줄게.] 그래서 나온 시장은 활기찬 곳이었다. 물건 파는 상인들이 여기저기서 물건을 사라고 외쳤는데, 그 물건들이란 것은 음식 반찬이나 과일보다는 생전 처음보는 신기한 물건들이 더 많았다. 오색의 영롱한 빛을 내뿜는 구슬이 있는가 하면, 피처럼 붉거나 바다처럼 푸른 보석도 있었다. 비단 가게에 좍좍 늘어져 있는 비단은 자기 맵시를 뽐내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잘 만들어진 도자기들과 특이한 형태의 모자들도 많이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필요한 곳에 가서 가격을 가지고 주인들과 흥정을 해댔다. 지훈이 발을 멈춘 곳에는 여러 모양의 단도들이 날카롭거나, 아름답거나 혹은 귀여운 모양은 맘껏 발휘하며 놓여있었다. 수 십 가지도 넘는 단도들은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었다. 그 많은 단도들 중에서도 특히 수빈의 눈에 화악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하얀 상아로 만든 손잡이 한 가운데에 까만 흑진주가 박혀 빛을 발하는 단도가 수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치 까만 흑진주가 우혁인 것만 같이 빛나서 수빈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훈이 뭐가 마음에 드느냐고 묻기도 전에 수빈은 그 단도를 집어 들었다. [나 이게 좋아.] 주인장에게 금전을 하나 던져준 지훈은 어마어마한 액수에 놀라 주인장이 황망히 일어나 인사하는 것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 후, 수빈의 단도를 살펴봤다. [호오~ 보는 눈이 있는데? 흑진주라... 묘하게 누굴 생각나게 한단 말이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지훈의 말에 수빈은 얼굴을 붉혔다. [.....//////////....] [후후 또 얼굴 빨개졌다.] [아씨, 놀리지 마!!!] [알았어, 알았어..] 지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수빈을 돌려세웠다. [얼른 집에 가자. 우혁이가 너 없으면 난리날게다.] 지훈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우혁이 돌아왔다. [빈아.. 아, 지훈이도 와 있었군.] 왕을 만나고 와서인지 우혁의 옷차림은 퍽이나 멋있었다. 온몸을 감싼 검은 옷과 머리 위로 틀어 올린 검은 두건 덕에 우혁의 모습은 빛나는 흑진주 같았다. 옆구리에 장비한 긴 칼은 우혁의 강인함을 돋보이게 했다. 자꾸만 우혁이 애인이란 사실이 조금 두려울 정도로 기분이 좋다. 시도 때도 없이 그를 가지고 싶다. 우혁은 칼을 풀어 잘 걸어두곤, 수빈에게 다가와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우혁의 시원한 향이 코를 적셔준다. [오늘은 뭐 했어? 계속 지훈이가 같이 있어줬어?] [응.] [그래.] 그가 그래..라며 부드럽게 대답할 때, 봄비가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도 나가?] [응. 밀린 일이 많아서 일찍 나가야 할 거야. 그래도 내일은 오늘보다 일찍 들어올게.] 지훈과 이야기를 하느라 몰랐는데, 밖은 어느새 어두워진 후였다. 가을밤의 멋쟁이 귀뚜라미가 시끄러울 정도로 크게 울어대고 있었다. [나 지훈이가 단도 사줬어.] 수빈이 품에서 단도를 꺼내며 배시시 웃었다. [그런 건 왜 가지고 다니게... 위험하잖아.] 우혁은 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혔다. 잘생긴 콧등 위로 가볍게 생긴 주름이 멋있어 수빈은 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뭐하긴~! 내 몸을 지켜야지!!!] [니 몸은... 내가 지켜..] 우혁이 검지손가락으로 수빈의 턱을 받쳐 살짝 들어올리며 수빈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기분... 좋다.. [야, 야~ 애정 행각은 나 간 후에 해라.] 지훈이 툴툴거리며 일어섰다. [아.. 지훈.. 아직도 있었군.] [뭐냐, 내가 그렇게 존재감이 없냐?] 지훈은 섭섭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일은 너도 함께 나가야 해. 알지?] [그래, 내일 보자. 아... 수빈이 너무 혹사시키지 마. 볼 때마다 마르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기억을 잃은 것도 분명.. 니가 너무 과격해서 그런 걸 거야.] 지훈은 실없는 소리를 한 번 내뱉고는 제가 생각해도 실없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집을 나섰다. 우혁이 없는 아침은 뭔가를 잃은 듯이 허전해서 조금 두렵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아직도 남아있는 우혁의 향기는 우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그래도 눈을 떴을 때 우혁을 볼 수 없음은 정말 외로운 일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고 내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그 때의 모든 것들은 꿈이 아닐까..하는... 분명.. 그럴 것이다. 우혁이 없는 현실 따위는 생각하기도 싫기 때문이다. 우혁이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수빈은 멍하니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오늘은 지훈도 국왕을 보러 갔으니 놀러오지 않을 게 분명하다. 컴퓨터도 없고, TV도 없고.... 우혁이나 지훈과 함께 있을 땐 몰랐는데 정말 할 일 없는 곳이다. 옆엔 우혁이 두고 간 듯한 쪽지가 있었지만 어차피 읽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에 옷 주머니에 곱게 넣어둔다. 시장에나 갈까.. 구경할 거 많던데... 수빈은 주섬주섬 일어나 옷매무새를 대충 고치고는 터덜터덜 집을 나섰다. 시장은 변함없이 활기차고, 구경할 것이 많았다. 어제와는 새로운 물건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시장 안의 사람들은 어제 수빈이 지훈과 함께 있는 걸 봐서인지 모두 고개를 숙여 수빈에게 인사를 했다. 지훈은 놀기만 하는 앤 줄 알았는데, 정말 높으신 분이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시간을 걷다 보니, 배가 고파지는 것을 느끼며 수빈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어제 지훈이 사준 단도만 손에 잡힌다. 으... 돈 좀 주고 가지. 매정하게 그냥 가버린 우혁을 원망하며 수빈은 허리를 쭉 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요새는 계속 날씨가 좋은 것 같다. 하늘을 보고, 시장을 쭉 둘러보다가 어느 곳에서 수빈의 시선이 멈추었다. 그것은 왕궁이었다. 아름답게 지어진 그 왕궁에서 우혁이 일한다고 생각하자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수빈이다. 우혁이 보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궁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일까.. 수빈은 이끌리듯 궁으로 향했다. 커다란 궁은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지키던 병사들이 수빈을 막았지만 한 병사가 [풍사님의....]라며 어쩌구저쩌구 속삭이자 그들을 황망해하며 얼른 비켜서서는 깊이 허리 숙여 수빈에게 인사를 했다. 익숙치 않은 경의에 수빈은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아진 수빈은 조금 우쭐해진 심정으로 안에 들어갔다. 궁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화려했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했다. 그들을 슥슥 스쳐 지나 어디로 갈지 몰라 두리번거리던 수빈은 다짜고짜 아무 곳으로나 걸음을 옮겼다. 주변이 온통 나무로 덮힌 그곳은 한가운데에 커다란 연못이 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연못 중앙에 활짝 핀 커다란 연꽃은 아름다운 주홍빛을 뽐내고 있었고, 싱그러운 나뭇잎 향기가 수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연꽃이 떠 있는 연못을 처음으로 본 수빈은 연못가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맑은 물을 찰방였다. 잔잔하던 연못은 수빈의 손길을 받고는 너울거리며 건너편까지 수빈의 존재를 알렸다. 어디선가 이름 모를 새가 울고 있었다. 우혁이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또 우혁의 생각이다. 끊임없이 우혁의 생각만 난다. 저벅... 발자국 소리에 수빈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몸을 움츠렸다. 막연한 불안감이 몸을 휘감았다. 왠지 들어와서는 안 될 곳에 들어온 것 같다는 불안감.. 그런 생각 때문에 그런지 발자국 소리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넌 누구기에 금지된 곳에 들어온 것이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 어렸을 때부터 쭈욱 들어왔던... 아주 친근한 목소리... 수빈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성훈아!!!] 성훈이 그곳에 서 있었다. <6> 적휘국의 왕인 성훈은 잠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우혁과 지훈과의 추억의 장소... 다른 이들의 발이 이곳을 더럽히는 것이 싫어 함부로 이곳에 들어오면 못을 베겠다 엄포를 놓은 후, 이곳엔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다. 금지된 장소에 들어와 있는 모습에 불쾌해져 이름을 불렀더니, 왕이 된 이후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어릴 적의 이름을 부르며 활짝 웃는다. 어릴 적의 이름을 아는 것은 귀족들밖에 없을 터, 일반 평민이라면 감히 왕의 아명을 알 리가 없다. 하지만..... 성훈은 인상을 찌푸리며 수빈을 하나하나 뜯어봤다. 귀족의 자녀 중에 이리도 아름다운 처자가 있었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다. 달을 머금은 듯 하얀 피부와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눈, 사람을 유혹하는 듯한 붉고 촉촉한 입술, 푸른빛의 옷 위로 곧게 뻗은 목선... 성훈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아름다운 사람이다. 하지만 성훈은 한 나라의 왕..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키스를 할 만큼 충동적이지는 않았다. 성훈이 조금도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자, 수빈이 눈을 크게 뜨고 성훈에게 물었다. [성훈아.. 왜 그래?]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며 성훈은 이 소녀를 모르는 자기 자신이 크나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이 느껴졌다. 이 소녀를 가지고 싶다.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버릇이 없구나. 난 적휘국의 왕 휘문이다.] [응?]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 모습이 확 끌어당겨 안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다. 이 소녀는 사람을 충동적이게 만든다. [넌 누구냐?] [아... 나? 나 수빈이야. 왜 그러냐, 갑자기..] [어느 집안의 자제인가.] 우혁의 애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건 왠지 우혁에게 폐가 될 것만 같아서 숨기곤 다른 답을 구해본다. [음.. 현씨 집안...] [현씨라......] 성훈은 현씨 가문에 대해 되짚어보려 했지만 현씨 중에선 궁에 마음대로 들어올 만큼 높은 신분이 없는 것 같다. 그럼... 길가의 여자란 말인가.. 성훈은 씁쓸하게 수빈을 다시 한 번 살폈지만, 청초함이 흐르는 그녀의 모습에선 귀족 집 자녀의 기품을 찾을 수 없어도, 유곽의 여자 같은 값싼 모습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집안의 자제이든 간에 세상물정 아무 것도 모르게 곱게곱게 키워서는 오늘 나들이를 내보낸 듯한 모습이다. 성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일단... 왕실로 가자.] 화려함의 극치... 벽에 박힌 오색영롱한 보석들과 멋지게 장식된 보검들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수빈의 모습을 성훈은 반쯤 놀라운 감정으로 지켜봤다. 왕인 자기의 앞에서 모두 감정을 절제했고, 성훈 역시, 어렸을 때부터 감정을 절제하라 배워왔기에 자기 속마음을 그대로 내보이는 수빈의 모습이 신기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너무너무 예쁘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수빈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성훈은 그만 [네가 더 예쁘구나.]라고 말할 뻔 했다. 수빈을 볼 때마다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리를 차지했다. 가지고 싶다. 전국의 난다긴다하는 많은 여자들을 봐왔고, 수도 없이 많은 여자들을 안아왔지만 단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여자는 없었다. 이 소녀가 양갓집 규수이든, 길가의 여자이든..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버려도 좋을 만큼 수빈이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 품 안에 가두어 하루 종일 보면서 살고 싶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수빈을 쳐다보는 궁녀들을 나가라 이른 후, 성훈은 의자에 앉았다. 성훈이 앉으란 소리도 안 했건만, 수빈은 당연하다는 듯 성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예의가 없는 그 행동도 미칠 듯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성훈이다. 꼬르르르르르르 방안을 울리는 그 소리에 성훈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이 아이는 정말... 사람 기분 좋게 해준다. [..../////////.....왜, 왜 웃고 그래!!!] [배가 고픈 게냐?] [응. 배고파.] [그래, 간단한 요깃거리를 내오도록 하마.] 성훈이 누군가를 부르자 어디서인지 빠르게 나타난 궁녀가 허리를 굽히며 성훈의 지시를 기다렸다. [간단하게 요기할 만한 것을 들여오너라.] 궁녀는 뒷걸음질을 쳐 방을 빠져나갔고, 잠시 후,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탁자 위에 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나갔다. [이게... 간단이야?] 휘황찬란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수빈이 중얼거렸다. [그래, 어서 들거라.] [고마워, 성훈아.] 수빈이 웃을 때면 눈이 예쁘게 접힌다. 그 모양이 질 때의 달과 같아 무척이나 신비롭다. 아예 음식에 얼굴을 박고 먹는 모습은 다른 사람이 그랬더라면 눈살을 찌푸릴 모습이겠지만 수빈이 하기에 사랑스럽게 보인다. [후아~ 잘 먹었어, 성훈아.] 어색하게 느껴졌던 아명도 이제는 좀 익숙하게 느껴졌다. 만족한 듯 활짝 웃는 수빈의 얼굴을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수빈.] [응?] [너... 내 것이 되겠느냐?] 성훈은 결국 마음속의 말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그게 무...무...무슨 소리야...?] 수빈의 놀람이 왕에게 선택받은 자가 짓는 기쁨의 놀라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수빈의 대답이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도 못 했다. [싫어!!!] 성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왕이 친히 내 것이 되라 말하는데 싫다 하다니, 설령 싫다 하더라도 싫다 말하면 안 되는 것을... 수빈은 너무도 쉽게, 너무도 단호하게 거절해버린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난 우혁이 거야!!!!] 아깐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이 당황을 해서인지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그리곤 곧 후회해버리는 수빈이었다. 성훈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맺혔다. [쿡... 풍사의 것이란 말이냐..]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수빈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그만 가볼래.] [거기 앉거라.] [싫어, 나 갈 거야!!] [내 허락 없인 가지 못한다.] 단호한 말투.. 수빈은 입을 삐쭉 내밀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성훈은 생각에 잠겼다. 풍사.. 그거 아느냐. 처음으로 네 것이란 걸 모르면서도 무언가가 갖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성훈은 사람을 시켜 우혁을 불러오라 일렀다. 성훈의 입가에 맺힌 차가운 미소를 보며 수빈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우혁의 말이 떠오른다. 왕의 눈에는 띄지 말라고 했던...... 뭔가...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다. 곧 문이 열리고 우혁이 들어왔다. 어제처럼 검은 옷을 입고, 긴 칼을 옆에 찬 우혁의 모습은 시릴 정도로 아름다워 가슴이 뭉클해진다. 우혁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미처 수빈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우혁의 모습은 집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달라서, 건드리면 베어버릴 듯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우혁의 뒤로 지훈도 보였다. [아... 운사도 왔느냐.] [네, 주군.] [그래.. 풍사, 운사. 고개를 들어라.] 우혁이 고개를 드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지나갔다. 그리고 우혁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시간이 멈춘 듯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 수빈은 숨이 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그 방 안엔, 시간도, 공간도, 공기도,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우혁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우혁의 눈은 산산조각이 나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롭게 수빈을 응시하고 있었다. 늘 따뜻한 미소만을 보여주던 우혁의 눈에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의 빛이 떠올라 거세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 우혁을 보는 것만으로도 찢어질 듯 가슴이 아파와 수빈은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서로만이 존재하는 그 공간 안에서 아픔을 안고 서로를 응시하고 있을 때, 불협화음과도 같은 성훈의 목소리가 둘 사이의 다리를 깨뜨려 버렸다. [수빈을 나의 비로 삼겠다. 왕비가 되기 전까지 그녀의 이름은 승아가 될 것이며, 그녀의 거처는 선궁 가장 높은 곳이 될 것이다. 풍사.. 승아를 잘 살펴 주거라.] <7> [수빈을 나의 비로 삼겠다. 왕비가 되기 전까지 그녀의 이름은 승아가 될 것이며, 그녀의 거처는 선궁 가장 높은 곳이 될 것이다. 풍사.. 승아를 잘 살펴 주거라.] 차라리.... 제 목을 친다 하십시오. 나의 주군이시여. 제가..... 당신의 말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차라리.... 날 죽이고.... 수빈을 데려가십시오. 주군이여.. 수빈은..... 나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오니.... 내게서 수빈을 가져감은.... 나를 더 이상 내가 아니게 함이옵니다. 내가 목숨을 바친 나의 주군이시여... 간절히 원하오니.... 차라리... 나의 목을 치시옵소서... 수빈.... 우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수빈....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수빈을 잡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부여잡고, 끌어안고, 키스하며... 어째서 이곳에 들어왔느냐, 얼른 집으로 돌아가자 말하고 싶지만.... 왕이 선언했으니 이제 수빈은 왕의 것이다. 그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수빈이란 예쁜 이름을 입에 담는 것도 죄가 되어버린다. 감추면 알 길 없는 사랑하는 마음만을 이 찢겨진 가슴 한 구석에 곱게곱게 담아 남몰래 가지고 다녀야만 한다. 없애려 노력은 하겠지만, 100년이 흘러도, 1000년이 흘러도 없어질 리 없으니 그냥 가슴에 품고 아픔을 지닌 채 살아야만 한다. 우혁의 생명수였던 사랑은 이제 독이 되어 온몸으로 퍼져나가 우혁을 썩게 만들겠지만, 그 독을 중화시킬 약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니 그렇게 속에서부터 썩어가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통을 참아야한다. 그래야만 한다. [괜찮냐?] 지훈이 물었다. 우혁은 공허한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삶을 잃은 듯한 눈빛에 지훈은 왠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냐는 한 마디로 위로해주기엔 그들의 사랑이 너무 깊었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 말도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한 번 더 우혁에게 물어본다. [괜찮냐, 우혁아..?] 우혁은 대답 없이 지훈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춤에 있던 칼을 뽑아 손잡이를 지훈 쪽으로 돌렸다. 옆을 지나가던 궁녀들이 몸을 움츠리며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갔다. 지훈은 인상을 찌푸리며 우혁의 장검을 응시했다. [날.... 죽여라....] 우혁의 것 같지 않은 절망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명이 담기지 않은 그 목소리는 정말이지... 이 세상 사람의 것 같지 않아서 마치 사자(死者)와 대화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했다. [내 목을 베어라. 이 머리로 아무 생각할 수 없도록... 나의 심장을 도려내라. 더 이상 그녀에 대한 사랑을 담지 못하도록... 부탁이니.... 날 죽여라..] 우혁은 쓰러질 듯, 끊어질 듯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슬픔이 흐르고 있었다. 우혁의 주위를 감싼 바람이 우혁의 슬픔에 공감하며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풍사... 호에 맞게 우혁의 주변을 늘 감싸고 있던 싸늘한 바람은 절규하는 흔들림이 되어 공기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우혁의 슬픔이 너무 짙게 느껴져 지훈은 가슴이 아파왔다. [정신 차려라, 우혁아.] [날 베어라. 부탁이니....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도록.. 날 베어라.] 우혁 답지 않은 흔들리는 목소리로 우혁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니가 지금 죽으면.... 수... 아니.. 승아님은... 누가 지키냐? 니가 그랬잖아. 승아님은 니가 지키겠다고.... 그게 바로 어제의 일이야. 벌써 잊었냐?] [...............] 우혁은 슬픔이 가득 담긴 눈으로 지훈을 응시했다. 그런 우혁을 호되게 나무라는 것이 죄스러웠지만 지훈은 계속해서 말했다. [승아님은 평민이시다. 출생도 알 수 없는 평민... 어쩌면 노예였을 수도 있어. 대신들은 승아님의 출생을 비난할 거고... 많은 궁녀들이 승아님을 질투하여 괴롭힐 거야. 승아님은... 니가 더 잘 알겠지만... 무척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니가 지키지 않으면... 승아님은 쓰러지셔. 그러길... 원하는 거냐?] [.....................] 우혁은 쓰러질 듯 걸어 수빈이 묶게 될 상궁의 높은 방으로 향했다. 선궁은 궁녀들이 묶는 곳이었고, 그곳의 가장 높은 방은 이제 곧 왕의 비로 발탁될 여인이 거하는 처소였다. 모든 궁녀들이 꿈꾸는 처소인 것이다. 화려한 방문부터 그곳이 범상치 않은 곳이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방 안 역시 온갖 비단과 보석들로 치장되어 있었지만 우혁은 그곳이 수빈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수빈은 다른 궁녀들과 다르다. 호화스런 것들에 길들여진 세상적인 여자들과는 전혀 다르다. 깨끗하고, 청초하며, 단아하다. 남자에게 꼬리칠 줄이나 아는 여자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귀한 몸이다. 이런 오색형롱한 곳보다... 더 하얗고 깨끗한 곳이 어울린다. 우혁은 명령을 듣기 위해 따라온 궁인에게 말했다. [이곳을 하얗게 바꾸거라.] [예?] [내게.... 두 번 말하게 할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풍사님..] 싸늘한 우혁의 말투에 궁인이 당황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런 잡다한 것들 전부 떼어내고, 최고급의 비단을 사용하여 이곳을 온통 하얗게 만들거라. 비단은 세 번째 비단 상인의 집에서 구입하고, 침대는 이 방의 중앙에 위치하도록 해라. 탁자는 오동나무로 만든 둥근 탁자를 침대 왼편에 두고, 의자엔 토끼털을 두 번 겹쳐 만든 방석을 올리도록 해라.] 조금이라도 예전 살던 집과 비슷하게 하여 이런 동떨어진 곳에서 어색해하지 않도록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지시하는 우혁이다. 대신과 궁녀들의 등쌀에 시달리다가 이 방에 들어오면 고향에 온 듯 편안한 느낌을 받게 하기 위해 하나하나 꼼꼼하게 지시를 내린다. 수빈은 몰라주더라도, 수빈이 이제 왕의 것이라도 수빈을 향한 우혁의 마음은 한결 같기에..... [이 방에 오시는 분을 극진히 모시거라. 약간의 불편함도 없을 정도로 너의 목숨을 다하여 극진히 모시거라. 그 분 앞에 떨어진 작은 티끌조차 그 분의 섬세한 몸에 상처를 낼 수 있고, 약간의 맛이 변한 음식도 그 분의 귀한 몸에 안 좋을 수 있으니 너의 성심을 다하여 살피도록 하여라. 잠자리가 조금 불편해도 잠을 못 드시는 예민한 분이시니 매일 같이 잠자리를 점검하고, 점검했다 하더라도 한 번 더 점검하는 꼼꼼함을 기르거라. 날씨가 건조할 땐 그 분의 약한 살이 틀 수도 있으니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 분의 피부를 보호 하거라. 과다한 보호를 받고 자란 이는 약해진다 하지만, 그 분은 그만한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고, 약해진다 하면 더 큰 보호를 하면 될 것이니, 아끼고, 또 아껴 그 분을 극진히 모시도록 해라. 알겠느냐?] 한 마디, 한 마디에 뼈를 깎는 고통이 들어있다는 것을 그 궁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방을 다시 한 번 둘러본 우혁은 주먹을 꼭 쥐고는 그 방에서 빠져나왔다. [뭐야, 고성훈!!!!!] 수빈이 날카롭게 외치며 성훈을 팔을 뿌리쳤다. 우혁의 눈빛이 떠나질 않는다. 세상을 잃은 듯한 그 공허한 눈빛... 그 눈빛에 분노라도 조금 섞여 있었더라면 마음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 텐데... 오직 고통과 절망만이 자리 잡고 있어 더욱 가슴이 아파진다. 방금 물러갔는데도.. 우혁이 그립다. 성훈은 말없이 수빈을 응시했다. 성훈의 깊은 눈동자가 수빈을 담아내고 있었다. 또... 우혁의 것이다. 우혁은 어렸을 적부터 성훈보다 뛰어났다. 검술도, 학식도, 풍기는 매력과 사람을 끌어들이는 능력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우혁의 주위로 모여들었고, 우혁은 그런 사람들에게 미소 한 번 지어주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우혁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듯 우혁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은 건국 이래 최대의 전성기라 하지만, 결국 여기 모인 능력 있는 자들은 전부 우혁의 인덕을 보고 모인 자들이었다. 그들은 우혁에게 충성했고, 우혁이 성훈에게 충성하기에 성훈에게도 충성을 받쳤다. 만약 우혁이 돌아선다면, 그들 역시 성훈에게서 돌아설 것은 뻔한 일이다. 사실.... 성훈은 그러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우혁이 반기를 들어, 그들과 함께 반역을 일으켜 우혁이 왕좌를 차지하길 바랐다. 어렸을 적... 친척 동생인 지훈이 우혁에게 푹 빠졌을 때도 성훈은 우혁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 성훈 역시, 우혁을 많이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꽁꽁 얽매인 궁의 생활에서 우혁을 만나는 시간만큼은 자유로웠다. 한데... 13살 때의 전국적 검술 시합에서... 마지막으로 우혁과 성훈이 남았을 때, 우혁이 기권을 하는 바람에 성훈이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혁은 몸이 안 좋아서 그랬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성훈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우혁만큼은 진실 되게 대해준다고 믿었는데, 우혁에게도 결국 성훈은 왕의 아들일 뿐이었던 것이다. 우승의 상을 받을 때, 구경꾼들이 뒤에서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후론, 우혁을 화나게 하기 위해 늘 우혁이 가진 좋은 것들을 빼앗았다. 우혁이 화가 나고, 반기를 들었을 때 그 때에야 성훈은 자기의 진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혁이 있는 한은 성훈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국 우혁의 공으로 돌아가고 만다. 하지만... 아무리 뺏고, 또 빼앗아도 우혁은 늘 한결 같은 표정으로 성훈을 대했다. 약간의 반항이 섞인 무표정... 그런 표정으로 지그시 성훈을 응시하곤 했다. 물론 아주 잠깐이지만 우혁이 그런 눈빛으로 쳐다볼 때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럴 땐, 더 화를 내며 뭐든 우혁의 것을 빼앗고, 우혁이 할 수 없을 만한 억지 명령을 내리는데도 우혁은 좌중을 압도하는 나직한 목소리로 아무런 불평 없이 대답을 한다. 어떤 것을 빼앗아도 표정 변화 없던 우혁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늘 싸늘하던 무표정한 그 얼굴에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고통의 감정이 실렸던 것이다. 세상을 잃은 듯한 그 표정을 보며 묘한 승리감과 알 수 없는 허무감을 동시에 느낀 성훈이다. 젠장... 하지만... 가져도, 가져도 그것은 성훈의 것이 되지 않는다. 수빈을 가졌지만..... 수빈의 맑은 눈동자 안에는 여전의 우혁의 잔상이 남아있다. 우혁이 아닌 다른 이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우혁만을 한 가득 담고 있다. 언젠가 우혁이 아끼던 강아지를 빼앗았을 때, 좋은 음식과 좋은 환경에서 강아지를 키웠지만, 그 강아지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우혁이 있는 곳을 향해 누워 있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낱 금수조차도 우혁만을 그린다. 궁녀들조차도 우혁에 대한 연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터였다. 그래도 우혁이 비난 받지 않는 것은 우혁의 절도 있는 행동 덕분이었다. 우혁은 단 한 번도 궁녀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넨 적 없었다. 아니.. 궁녀들 뿐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수많은 여자의 유혹을 단칼에 뿌리치는 우혁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불러 일으킬만 했고, 그로써 우혁의 인망은 두터워져만 갔다. 지금.... 수빈의 눈에도 우혁뿐이다. 분명 수빈도 넘어오지 않을 것이다. 알면서도, 알면서도 수빈이 가지고 싶다. 우혁만을 담고 있는 눈 때문에 우혁이 자꾸 떠올라 화가 나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 평민의 자식이지만 걱정되지 않는다. 우혁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조아렸기 때문이다. 만약 우혁이 약간의 질책이라도 했다면 수빈을 안으면서도 걱정이 떠나질 않았겠지만 우혁이 뜻을 받아들인 지금, 든든한 후원자를 얻은 것만 같은 기분에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우혁은 모든 것을 뺏어가는 주군임에도 늘 변함없는 깊은 충성을 맹세한다. 때로는 화가 치밀어 오를 정도로...... [정말 짜증나, 고성훈!!!!] <8> [정말 짜증나, 고성훈!!!!] 수빈이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성훈은 회상에서 깨어나 수빈을 응시했다. [정말 짜증난다구!!! 갈 거야!!!] [넌 이제 비가 될 몸이다. 경거망동은 삼가도록 해라.] [경거망동? 난 비 따위 안 될 거야. 누가 그런 거 하고 싶대? 니가 억지로 날 불러다가 그런 거 시킨 거잖아.] [나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웃기지 마!!! 난 우혁이한테 갈 거야!!!] [풍사는... 너의 호위관이 되었으니 낮에 볼 수 있을 것이다.] [웃겨.. 난 우혁이가 아니면 안 돼!!] [풍사는 한낱 신하일 뿐이다. 이제 넌 곧 비가 될 귀한 몸이니, 신하의 이름을 그 입에 올리지 말고, 호를 사용하도록 하여라. 만약 우혁이란 이름이 한 번 더 내 귀에 들어왔다간... 우혁의 목을 베도록 하겠다.] [아............] 수빈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다물었다. 우혁의 이야기가 나오자 놀라울 정도로 얌전해진 수빈이다. 고개를 숙인 수빈은 초조한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앞으로 넌 왕비에 맞는 언사와 품행을 배워야 할 것이다. 앞으로 교육을 담당한 궁녀를 보내줄 테니... 많은 것을 보고 익히도록 해라.] [날... 보내줘..] [그럴 순 없다.] [부탁이야. 제발.. 날 우.. 아니.. 풍사에게 보내줘. 난.. 이곳이 너무 답답해... 다시는 이 곳에 안 올 테니까... 제발... 제발 날 풍사에게 보내줘..] [풍사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냐?] [.......내가... 이러면... 풍사가 곤란해지는 거야?] [....그래.] [........하지만.... 난 정말....... 가고 싶어...] [넌.. 나의 것이다. 내가 택했으니 나의 비가 되어야만 한다. 누구도.. 나의 선택을 막을 수는 없다. 그게 설령 너라 할지라도......] [대체 왜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는 거야!!!] [어린애처럼 구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지?] 성훈이 수빈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겨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이에 다가가 속삭였다. 수빈은 인상을 찌푸리며 성훈의 가슴을 밀어냈다. [이러지 마, 하나도 안 멋있어.] 성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의 눈엔 풍사뿐인 것이냐.] [당연하지.] [곧.. 너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은 내가 될 것이다.] [아니, 절대 그럴 이.....읍.....] 앙칼지게 대들려던 수빈은 성훈이 갑자기 입술을 덮치자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뜨거운 입술이 수빈의 입술 위에 겹쳐져 있었다. 성훈의 혀가 밀고 들어오려 하자, 수빈은 입을 꾹 다물고 두 손으로 성훈의 가슴을 밀어냈다. 성훈은 씁쓸하게 웃으며 수빈에게서 떨어졌다. 보란 듯이 옷자락으로 입술을 닦은 수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성훈을 노려봤다. [선궁으로 들어가거라. 그리고 내가 부를 때 이곳으로 와 날 기쁘게 하거라.] [내가... 니 장난감이냐?] [아마도... 그리 될 것이다.] 허리를 똑바로 펴고 앉은 성훈은 말만 왕이 아닌지, 범접치 못할 기품을 뿜었지만,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다른 세계에서 너무 오랫동안 친한 친구로 지내온 성훈이기에 왕인 성훈의 모습은 너무나 생소했다. 우스워 보이기까지 한다. [들어가거라.] 수빈이 안내할 궁녀를 따라 선궁으로 간 후, 성훈은 지금까지 가장 아끼는 궁녀였던 령(怜)을 불렀다. 그녀의 아명은 소연이었는데, 높은 신분인 서후 대신의 둘째 딸로 그 뛰어난 미색을 자랑하여 12살이란 어린 나이에 왕에게 발탁되어 궁녀로 들어와 있었다. 성훈이 워낙 아껴 곧 왕비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궁내에 파다했다. 소연은 워낙 성품이 순하고, 겸손해서 그런 소문이 돌아도 거만함 없이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처럼 조용히 행동을 해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소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그래, 령.. 방금 나간 소녀를 보았느냐..] [네, 폐하.] [어떻더냐?] [아름다우십니다.] 폐하.. 어찌하여 제게 그런 것을 물으시는 겁니까... 폐하를 향한 저의 연정... 폐하는 모르시옵니까.. 이 절실한 저의 마음... 폐하는 정녕 모르시옵니까. [그렇구나. 령아.. 지금 나간 소녀는 승아라 한다.] [네에...] 소연은 제발 성훈이 최악의 말을 하지 않길 바라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승아를.. 곧 나의 비로 삼을 생각이다.] [....................] 차라리... 칼로 절 찌르십시오. 폐하... 제게 이런 아픔 주시지 말고.... 절 찌르십시오. 내게 웃어주셨던 그 미소들과 나에게 속삭이셨던 사랑의 언어들을 다른 여인에게 주실 것이라면.... 절 죽인 후에 하시옵소서. [하지만 널 아주 내치지는 않을 것이니 심려 말거라. 넌.. 내가 부를 때 이 방으로 와 나의 시중을 들면 된다.] 차라리.. 절 죽이십시오.. [허나 평소에는 승아의 시중을 들도록 하여라. 너의 거처를 선궁 높은 곳의 옆방으로 옮기도록 하겠다. 승아는 궁 안 법도를 잘 모르니, 네가 하나하나 꼼꼼히 가르치도록 해라. 그리고... 승아가 불편하지 않도록 성심을 다하여 보살피거라.] 제가.. 고통에 못 이겨 죽는 모습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네.. 폐하.. 명을 따르겠습니다.] 제 몸이 고통이 짓이겨... 가루가 된다 하여도.... 제 영혼이 갈가리 찢겨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하여도.... 폐하께서 기쁘실 일이라면... 모든 것을 바쳐 따르겠습니다. 소연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지만 수빈의 생각으로 가득한 성훈의 눈엔 위태로운 소연의 모습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그럼 나가보아라.] [네.. 폐하...] 쓰러질 것만 같이 어지럽지만, 조심조심 뒷걸음질로 왕실에서 나온 소연은 잠시 한숨을 크게 내쉬며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소연의 시중을 드는 궁인인 세야가 고개를 조아리며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선궁... 가장 높은 방...] 세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폐하께서 령님을 왕비로 간택하신 겁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세야의 말에 소연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폐하께서 왕비로 간택하신 분은.... 내가 왕실 문 앞에서 마주쳤던 소녀입니다. 승아님이라 하더군요.] 세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믿을 수 없다는 놀라움이 눈에 가득 찼다. [그게...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어제만 해도.. 폐하께서 령님을 그리도 아끼지 않으셨습니까?] [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요.] [령님이... 령님이 부족하시다니요!! 령님은 이곳 어느 여인네들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고귀하신 분 아닙니까. 이게... 이게 대체.....] 세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권력과 명예를 위해 성훈에게 달려드는 다른 궁녀들과는 달리, 성훈을 향한 소연의 진실 된 사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을 감사하지만.... 역시... 전 부족한 모양입니다. 선궁으로 가십시다.. 승아님의... 시중을 들어야 하니....] [그... 그런..... 그게 무슨....] [폐하의.. 명령이십니다.] 소연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승아님.] [승아라고 부르지 마, 혁아..] [풍사라... 부르십시오, 승아님. 이제... 언사도, 행동도 아끼셔야 합니다.] [승아라고... 부르지 마... 혁아....] [귀하신 입에... 미천한 저의 이름을 담으시면 안 되옵니다, 승아님.] [니가.... 승아라고 부르면.... 그러면.... 가슴이 아파... 혁아... 내 이름 불러줘.. 수빈이라고 불러줘.. 응?] [승아님....] 우혁은 슬픈 표정이 들키지 않도록 애쓰며 수빈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많이... 지치셨습니다. 쉬십시오.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가지... 마.... 가지 마.. 혁아... 응...?] [쉬십시오...] 우혁은 마음이 흐트러질 것만 같아 조금 차갑게 대꾸하고는 방에서 나왔다. 가슴이.. 아프다. 이런 고통은 어떻게 참아야할지 모르겠다. 문 앞에 서 있던 지훈이 다가와 비틀거리는 우혁을 걱정스러운 듯 쳐다봤다. [괜찮아?] [....그래....] [.......그러냐...?] [....돌아가자....] [..............] 지훈은 말없이 우혁의 뒤를 따랐다. <9> 선궁으로 들어오던 소연은 우혁을 보자 고개를 숙였다. 평소처럼 대답 않고 지나가려던 우혁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소연을 돌아봤다. [령이구나.] 주군께서 아끼시는 궁녀.... 주군... 혹시라도 령을 안아.... 승아님께 상처주시면 안 됩니다. 승아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시면 안 됩니다. [네, 풍사님.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그래. 선궁엔 어쩐 일이더냐?] [.....승아님의.... 시중을 들러 왔습니다.] [..........] 우혁의 대답이 없자, 소연은 살짝 고개를 들어 우혁을 살폈다. 평소의 우혁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빛이 우혁의 눈에 가득 차 있었다. 한동안 우혁은 뭔가 다른 생각을, 소연은 우혁과는 사뭇 다른 지금의 우혁을 쳐다보며 우혁의 대답이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아...] 우혁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소연을 응시했다. [승아님은... 귀한 분이시니... 너의 목숨을 다하여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 [네, 풍사님.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승아님을..... 잘 부탁한다.] 길게 끄는 듯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 우혁에게서 소연은 짙은 슬픔을 느꼈다. 풍사님... 풍사님의 사랑이셨던 겁니까? 소연은 한숨을 쉬며 수빈의 방으로 향했다. 늘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던 선궁의 높은 방은 문에 달려있던 호화로운 것들이 다 떼어지고, 새하얀 비단으로 곱게 싸여있었다. 세야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누가 여길 이렇게 만든 걸까요?] 소연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며 문을 향해 고했다. [승아님. 시중을 들게 된 궁녀 령이라 하옵니다. 승아님의 시중과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지금... 뵐 수 있을까요?] [.............] 대답이 없다. [저.... 승아님...?] [들어와.] 소연과 세야는 조금 놀랐다. 예의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말투... 세야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대체 저게 뭡니까? 어째서 폐하께선 저런 여자를 비로 삼으려는 거죠? 아무리 비로 간택되었다지만.... 령님도 낮은 신분은 아니신데....] [그만하세요, 세야.. 폐하의 부인 되실 분입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저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령님....] 세야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소연을 쳐다봤다. [그럼.. 뵙고 오겠으니... 여기서 기다리세요.] [네, 령님..] 쓰윽.... 하얀 문이 열리면, 눈이 부시게 하얀 방이 들어오고, 그리고... 그 깨끗한 방과 시리도록 잘 어울리는 수빈이 앉아있었다. 원래부터 방과 하나인 듯, 티끌 하나 찾아볼 수 없이 새하얀 수빈은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짓고 있었다. 왕비가 되었으니, 약간은 거만한 표정과 기쁨의 표정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세상을 다 잃은 듯 허망한 표정으로 가느다란 팔을 휘저으며 침대를 만지는 수빈의 모습은 모성애를 불러일으킬 만큼 가냘퍼 보여서 문득, 소연의 가슴까지도 아파왔다. [승아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연을 응시한다. 아니... 그 크고 검은 눈동자가 소연을 응시하는 것인지, 허공을 응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소연을 향했을 뿐, 소연을 담지는 않았다. [응. 왜?] 거리의 여자 같은 말투... 소연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원래의 표정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승아님. 뭐..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없어.] [불편하신 점은요?] [없어.] [그럼... 곧 식사 올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아... 하지만....] [누가 그 딴 거 먹고 싶대? 나가!!!] [승아님....] [나가라구!!! 혼자 있고 싶어!!!!] [알겠습니다. 승아님. 제 방은 승아님의 옆에 있으니... 언제든 필요하실 때 부르십시오.]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수빈의 모습을 보며 소연은 착잡한 기분이 되어 방에서 나왔다. 밖에 있던 세야는 뾰룽퉁한 표정으로 소연을 기다리고 있다가 소연이 나오자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돌아가십시다.] [저... 령님..] 방으로 돌아가며 세야가 소연을 불렀다. [왜 그러시죠?] [대체... 승아님은 어느 집안 자녀라 합니까?] [글쎄요... 폐하께서 그것에 대해 아무 언급하지 않으셨으니...] [분명.. 길거리 여자일 게 뻔합니다!! 안 그럼 어떻게 말을 저렇게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세야. 어째서 승아님께 그리 큰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제 비가 되실 분이니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입니다.] [............네... 령님... 하지만.....] [승아님은........] 소연이 세야의 말을 끊었다. [정말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폐하께서 승아님을 비로 삼으시려 하신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너무나 하얗고, 청초해서... 내가 들어가니 그 성스러운 곳을 범한 것만 같아 죄스러운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얀 곳에 앉아계신 승아님은 참으로 성스러우셨습니다. 마치... 선녀가 지상에 하강한 것처럼....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천계의 분들은 우리 하계 인간들이 알지 못할 그런 행동을 하시니까요.] 소연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령님....] [세야..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 마세요. 난... 폐하께 도움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쁩니다.] [네에..] [그럼... 세야도 돌아가 쉬세요.] [네, 령님.] 세야가 나가고, 소연은 의자에 가만히 앉았다. 아주 작은 부름에도 뛰어갈 수 있도록 얇게 만들어진 높은 방 사이의 벽.... 그 벽을 타고 여자의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쪽에선 꾹꾹 눌러 참으려는 것 같았지만 터져 나오는 흐느낌은 어쩔 수 없는지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져 들려왔다. 소연은 그 울음소리가 마치 저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만 같아 덩달아 가슴이 아파졌다. 승아님... 어찌 그리 슬프게 우시는 겁니까... 제가 갖고 싶었던 행복을 가지셨으면서... 어찌 그리도 서글프게 눈물 흘리시는 겁니까.. 소연의 눈에서도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벽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은 그쳤지만, 소연은 눈물로 소매를 적시며 앉아있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얼른 눈물을 닦은 소연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누구신가요?] [나야... 수... 아니.. 승아...] [아, 승아님..] 소연은 황망히 일어서 문을 열었다. 눈이 빨갛게 부은 수빈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소연의 방으로 들어왔다. [여기.. 앉으십시오, 승아님.]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소연이 내어준 의자에 앉았다. 말없이 턱을 괴고 앉아있던 수빈은 소연이 여전히 옆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편 의자를 빼며 말했다. [넌 왜 안 앉아?] [아니.... 저....] 예상치 못한 수빈의 행동에 당황한 소연은 어찌해야할 바를 몰라 수빈이 빼낸 의자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앉아. 다리 아프잖아.] [아.. 네에.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해. 감사할 건 나지. 여긴 니 방이잖아.]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소연은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 령...이라고 했지?] [네, 승아님.] [아까... 짜증내서 미안해.] [아닙니다, 승아님. 그런 작은 행동으로 제게 미안해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승아님의 시중을 드는 한낱 궁녀일 뿐이니 제 기분은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승아님의 기분이 풀어지신다면... 전 그걸로 족합니다.] [그런 말이 어딨어!!! 너랑 나는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니 기분을 상하게 하고... 내가 기뻐하라는 거야.] [하지만 전...] [됐어, 이런 말 하려고 온 거 아냐. 그냥... 미안하단 말 하려고 왔어. 아까 보니까... 표정이 많이 어둡던데.... 내 기분만 생각하고 화를 낸 것 같아서...] [승아님... 저 같이 미천한 것의 기분을... 그리도 생각해 주시다니... 정말.. 전...] [그게 무슨 말이야. 니가 뭐가 미천해. 넌 정말... 넌 정말.... 예쁘다구.] [아...........] 갑작스런 수빈의 칭찬에 혹시라도 비웃음이 섞인 건 아닌가 걱정하였지만 수빈의 눈동자는 그것이 진심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리도... 고귀하시니... 폐하의 사랑을 받으시는 거군요. 저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또 귀하시니.... 사랑을 받으시는 거군요. 누구도 살펴주지 않았던 미천한 저의 기분마저 돌아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승아님. 아름다우신 승아님께 칭찬을 들으니... 소녀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름답긴 뭐가 아름다워.] 다른 여인들처럼 기뻐하며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뚱하니 대답한 수빈은 그만 의자에서 일어섰다. [나 그럼 갈게. 늦은 밤에 미안해. 아깐... 정말 미안했어.] [아닙니다, 승아님.] [저기... 령.. 몇 살이야?] [예? 아... 전.. 올해로 17살입니다.] [으응. 그래. 난 18살이야. 으음.....] 가지 않고 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수빈은 결심한 듯 아까부터 속에서 준비한 말을 꺼냈다. [나... 이곳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심심할 때.. 놀러 와도 돼? 나.... 너무 답답하거든.] [네, 물론입니다, 승아님. 전 항상 이곳에서 승아님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으응.. 너도.. 너무 심심할 땐 내 방에 와.] [네, 승아님.] [그럼 잘 자, 령..] [편히 주무십시오, 승아님.] 승아님은 참으로 이상하신 분입니다. 저의 소중한 폐하를 빼앗아간 분인데도... 제 마음을 이렇게 사로잡아 버리시니... 승아님은 참으로 이상하신 분입니다. <10> 커다란 침대가 생소하게 느껴진다. 수빈이 있을 땐 몰랐는데 침대가 너무 넓다. 그리고 밤이 너무 춥다. 늘 품에 보듬어 안고 자던 수빈이 없으니 잠이 올 리가 없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감아 보지만 눈을 감아도 어른거리는 수빈의 모습 때문에 아프다... 가슴이 아프다. [수빈...] 궁에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이름을 작게나마 불러본다. [빈아....] 이제 입에 담아선 안 될 호칭을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본다. 부르면 웃으며 안기던 그녀는 이제 없다. 욱씬... 아픈 건 가슴뿐이 아니다.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세포 모두가 그녀를 잃은 슬픔에 반응하고 있다. 고통에 겨워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아침이 오지 않을 것처럼 힘겨운 밤을 보낸 우혁은 새벽빛이 희미하게 비추이자 침대에서 일어나 긴 장검을 허리춤에 꽂았다. [승아님. 앞으로 나의 목숨을 바쳐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우혁은 차갑게 한 번 중얼거리고는 궁으로 향했다. 높은 방엔 아무도 없었다. 마침 소연의 방에서 나오던 세야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승아님은...?] [폐하께서 내실로 부르셔서 가셨습니다.] 세야가 불퉁거리며 대답했다. [.....그러한가....] 우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가보거라.] [네, 풍사님.] 아픈 표정 짓지 말자.. 우혁은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칼로 찌른 듯한 고통이 온몸을 침범한다. 아픈 표정... 짓지 말자. 아무렇지도 않은 척.... 기분이 좋은 척.... 그리 행동을 해야한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걸음을 옮긴다. 최면이라도 걸리기를 간절히 바라며 힘겹게 걸어간다. 내실이 보인다. 왕이 궁녀들과 정사를 나눌 때 사용하는 방.... 우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수빈.... 이제.... 더 이상.. 나의 것이 되지 않는구나... [아... 풍사님..] 수빈의 생각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소연이 먼저 우혁에게 다가와 황망히 인사했다. [그래, 령이구나.] [네에...] [.........승아님은...... 아니, 아니다.] 우혁은 중간에 말을 끊으며 벽에 기대었다. [여긴 내가 있을 테니.. 이만 물러가거라.] [네, 풍사님.] 풍사님.. 하루 사이에 얼굴이 많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때로 너무 큰 아픔을 가져다주나 봅니다. 풍사님과... 저에겐..... [이러지 마.] 수빈이 목덜미를 쓰다듬는 성훈을 밀어냈다. 성훈은 대답 없이 수빈의 옷을 풀러 내렸다. 옷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며 수빈의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죽어.....버릴 거야....] 수빈이 인상을 찌푸리며 옷을 여몄지만, 성훈은 다시금 그 옷을 붙잡아 거칠게 벗겨 멀리 던져버렸다. 수빈이 황급히 이불을 끌어당기려 했지만, 성훈의 손이 수빈의 가느다란 팔목을 거세게 잡은 후였다. [내 허락 없인... 죽지도 못한다, 승아..] [정말... 정말 싫어..... 제발 이러지 마, 성훈아....] 수빈이 물기 어린 어조로 간절히 부탁해 보지만, 수빈의 맨살을 보고 이성을 잃은 성훈은 수빈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거칠게 수빈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더러워... 수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혁아... 미안... 미안해... 성훈의 뜨거운 혀가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우혁과는 다른 키스.... 조심스럽고, 간절했던 우혁과는 사뭇 다른 키스에 수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빈의 떨림을 느꼈는지 입술을 뗀 성훈은 천천히 수빈의 목덜미를 더듬어 내려갔다. 축축하게 젖은 느낌이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수빈은 마음과는 달리 터져 나오는 신음을 죽이려 두 손으로 입을 꼭 막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정말이지.... 너무나 더럽다는 생각뿐이다. 우혁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가슴이 아프다... [비.....흐읏.... 비켜....] 수빈이 떨리는 손으로 성훈의 머리를 밀어냈다. 그런 거부의 몸짓은 성훈을 더욱 흥분시켰다. [아악!!!!!!!!!!!] 성훈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수빈의 안으로 밀고 들어오자 찢어질 듯 엄습하는 고통에 수빈은 몸을 뒤로 젖히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 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고통에 헐떡거리는 수빈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성훈은 계속해서 수빈의 몸을 탐했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정신을 차린 수빈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이불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혀...가.....] 멈칫... 성훈의 움직임이 멈췄지만, 수빈은 그것도 깨닫지 못하고 몸보다 더 크게 다가온 마음의 고통을 가라앉히려 애쓴다. 이 고통은 고통이 아니게 여겨질 정도로 가슴이 아프다. [우...혁아... 으흑.... 우혁아.......] 자그마한 입술에서 절규처럼 우혁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미안.... 미안해... 혁아.... 으......윽....혁아....] 성훈은 자꾸 미안하단 말만 되풀이하며 몸을 떠는 수빈에게서 내려와 옷을 추슬러 입으며 차갑게 말했다. [다시 한 번 그 입에서 풍사의 이름이 나온다면.... 망설임 없이 풍사의 목을 벨 것이니, 그리 알아라.] [으....흑......흑...... 흐윽.... 안 할게.... 풍사의 이름.... 안 부를 테니까.... 풍사를.... 풍사를... 죽이지 마..... 죽이지 마.... 나.... 나....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죽이지 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며 끊어질 듯 말을 잇는 모습을 본 성훈은 떨어진 수빈의 옷을 집어 수빈에게 건넸다. [그만.... 나가 보거라.] 어지럽다. 주섬주섬 옷을 입어보려 하지만 손이 떨려서 자꾸 옷이 헛돈다. 성훈은 도와줄 생각 않고 힘겹게 옷을 다시 집어 드는 수빈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스럭 부스럭.... 1~2분이면 쉽게 입을 옷을 10분도 넘게 걸려 입은 수빈은 한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 쥐고는 비틀거리며 내실에서 나왔다. 걷기가 힘들다. 천금을 얹어놓은 것처럼 몸이 무거워 지금 앞으로 걷는 건지, 기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지러움이 점점 심해졌다. 복도가 일렁이고, 주위의 사람들은 춤을 춘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없을 정도로 아픈 발걸음을 하던 수빈은 결국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말았다. 땅이 가까워 오는구나.. 생각할 때쯤... 뭔가 그리운 향이 가까이 다가와 그리운 느낌이 수빈을 바쳐 들었다. 행복에 겨워 그리운 사람을 보려는데... 그리운 목소리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내어버린다. [승아님. 괜찮으십니까?] 또.. 눈물이 날 것만 같다. 하지만 여기서 눈물 보이면 우혁이 힘들어 할 것만 같아 애써 참아본다. 두 주먹을 꼭 쥐고 눈에 힘을 주며 눈물을 꾹꾹 눌러본다. [나....난.... 승아.. 아니야....] [승아님. 많이 지치셨습니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우혁이 수빈을 번쩍 안고 일어섰다. [나.... 승아 아냐, 혀가... 나.... 수빈이야... 응...?] 우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운 모습의 우혁.... 굳은 표정으로 앞만 보며 걷는 우혁은 늘 다정하게 미소 지어주던 우혁이 아닌 것만 같지만 그래도 볼 수 있어 기쁘다. 차가운 모습이라도, 무뚝뚝한 표정이라도 그저 볼 수 있다는 사실로 기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수빈이 아닌 승아란 이름이 나오면 가슴이 아파진다. 혁아... 너의 눈에 비추어지던 내 모습은.... 너무나 예뻐 보여서 기분이 좋았어. 그건... 니가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근데... 혁아... 너의 눈이 날 봐주지 않으면.... 난 지금 내가 너무 더럽게 느껴져서.... 정말.... 정말... 죽고만 싶어... 혁아... 수빈은 입술을 깨물며 우혁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우혁이 잠시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입을 열어 뭐라 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침묵이 낫다고 생각하는 수빈이었다. 우혁이 입을 열면 가슴 찢어질 말들만 내뱉을 것을 알기에........ [간단한 요깃거리를 내어오너라.] 기다리고 있던 소연에게 지시한 우혁은 침대에 조심스레 수빈을 내려놓았다.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수빈이 부서질 수도 있다는 듯이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며 수빈을 내려놓는다. 그 행동에 수빈은 더 가슴이 아파졌다. [혁아...] [풍사라 부르십시오, 승아님.] [나... 나.... 승아라고 부르지 마. 응? 예전처럼 다정하게.. 빈아라고 불러줘.. 내 이름을 불러줘, 혁아...] [저의 이름을 귀하신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선대왕께서 칭해주신 저의 호를 부르셔야 합니다.] [그런 말투 싫어, 혁아.] [이제.. 곧 비가 되실 분이니.... 언행을 바르게 하셔야 주군이 기뻐하십니다.] [그런 인간... 기뻐하지 않아도 돼!!! 너만 기쁘면 돼!!! 난 너만 기쁘면 된다구!!!!] 어째서... 그런 말씀 하시는 겁니까..... [안 됩니다, 승아님. 외람된 말씀이오만.... 이제 국가의 모 되실 몸이시니... 이런 어린아이 같은 행동은 삼가셔야 합니다.] [혁아... 혁아....] 아니됩니다, 승아님. 그런 눈으로 절 보시면... 저.... 겨우 먹은 마음 흐트러져버립니다. 그러니 나의 수빈... 귀한 이름은 가슴에만 품고 있겠습니다. 이 가슴으로만 간절히 부르겠습니다. [많이 지치셨습니다, 승아님. 령이 식사를 내어오면... 식사를 하시고 주무십시오. 필요한 것은 령에게 시키시면 될 것입니다. 전 보이지 않아도... 공기처럼 승아님의 곁에서 승아님을 지킬 것이니... 아무런 근심 없이 쉬시면 될 것입니다.] [나.... 안고 자... 혁아... 나 너 없으면 못 자... 그러니까 혁아... 나 꼭 안고 자... 응...?] 수빈이 두 팔을 쭉 뻗어 서글픈 눈동자로 우혁을 응시했다. 우혁을 향해 뻗은 가느다란 팔이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이런 행동은.... 제게 하시면 안 됩니다.] 차갑게 말한 우혁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려 방에서 나왔다. 문 앞에 서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기다리던 소연이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비켜섰다. [풍사님.....] [들어가 보거라.] [네, 풍사님..] [령..] [네.] [승아님이 불편하시지 않도록...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네, 풍사님.] 소연이 들어가고 우혁은 벽에 기대어 섰다. 한바터면 끌어안아버릴 뻔 했다. 부둥켜안고 촉촉한 입술에 미친 듯 키스를 하며 사랑한다 속삭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주군의 비이니.... 아무리 이 가슴 조각나도... 혼신의 힘을 다 하여 참아야만 한다. [승아님.... 행복하셔야 합니다. 저의 가슴... 이리도 아프게 하셨으니.... 승아님... 반드시... 그만큼 행복하셔야 합니다. 승아님 행복하실 길에... 심장을 밟고 가야 한다면... 미련 없이 저의 심장 빼어 그 앞에 놓아드릴 테니... 승아님.... 행복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야... 저도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11> 괴로워 보이는 우혁을 뒤로 하고 안에 들어온 소연은 수빈이 침대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는 조심조심 음식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울고 있는지 좁은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가서 안아주고 싶지만 함부로 그 몸을 건드리는 것도 죄가 되니 그렇게 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승아님..] 수빈이 놀라지 않을 정도로 작게 수빈을 불렀다. 어깨의 떨림이 멎었다. [식사... 들여왔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지 마.] 소연의 말을 끊으며 수빈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 네에... 승아님. 그럼.. 소녀 곁에 있겠습니다.] 소연의 대답을 들으며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난 수빈의 얼굴에선 눈물을 흘린 기색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조금 지친 듯 보였을 뿐이다. 한 손으로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의자에 앉은 수빈은 서 있는 소연을 보고선 다시 일어나 소연의 의자를 빼 앉으라는 듯 한 손으로 탁탁 쳤다. 소연이 황망한 듯 고개를 숙이며 의자에 앉았다. [저녁... 먹었어?] [아직 안 먹었습니다. 승아님 드시기 전인데 어찌 혼자 먹을 수 있겠습니까.] [으응. 그럼.. 같이 먹자.] [아... 하오나... 승아님은....] [한 번 더 니가 미천하다거나... 내가 귀한 몸이라거나... 그런 소리 하면....] 벌을 주겠다 하시렵니까? [난 정말... 너무 가슴이 아플 거야, 령...] 아..... 생각지도 못한 수빈의 말에 소연을 고개를 들었다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알겠습니다, 승아님.] [같이.. 먹을 거지? 혼자 먹기엔 너무 많아.] [네, 승아님.] 슬픈 눈으로 애원하듯 말하니 한 번 더 거절했다가는 저 작은 몸에 몇 번이고 못을 박는 꼴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깨작거리며 제대로 먹지도 않는 수빈이 안쓰러워 동생에게 그랬듯 무심코 앞에 놓인 전을 하나 집어 수빈의 그릇에 얹은 소연은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닫고는 당황하며 불호령을 기대했지만, 수빈은 처음으로 얼굴에 미소를 담으며 말했다. [고마워, 령. 우리 엄마도... 내가 밥 안 먹을 땐 이렇게 해줬는데....] 이 이상한 곳에 온 후로.... 우혁 때문에 한 번도 그립지 않았던 엄마가 너무 그리워져 가슴이 메여온다. 하지만 이제 누구의 앞에서도 울지 않겠다 결심했기에 입을 꼭 다물며 참는 수빈이었다. [아.... 네에...] [령.. 이름이 뭐야?] [네?] [그러니까.. 음.. 아.. 아명 말이야.] [제 아명은 소연이라 하옵니다.] [예쁜 이름이네.] [감사합니다.] [둘이 있을 땐.. 소연이라고 불러도 될까?] [하지만...] 미천한 이름을 어찌 입에 담으시려 합니까..라는 말은 조금 전 수빈의 말이 떠올라 꿀꺽 삼켜버리고 말았다. [네, 승아님. 그리 하십시오.] [어째서... 령이라던가.. 승아라던가... 그런 호 같은 게 생겨버린 걸까? 사람은 어릴 적 불리던 이름으로 불려야 가장 가슴 따뜻하고 기분 좋은 일인데....] [.............] [사랑하는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땐... 꼭 꿈속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눈을 살짝 감고 꿈을 붙잡듯 몽롱하게 이야기하는 수빈의 모습에 소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였던 우혁을 떠올렸다. 늘 차가운 표정과 굳게 다문 입술로 적휘국의 기둥이라 불리었던 우혁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표정 하나하나, 움직임 하나하나에 칼을 밟는 듯한 고통이 실려 있어 저게 우혁이 맞나..하는 의심까지 들었던 소연이다. [소연아. 내가... 불편해?] 수빈이 문득 눈을 뜨며 소연에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소연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 안에서 대답을 우물거렸다. 스스럼없이 대하는 수빈의 특이한 성격 탓에 불편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수빈은 소연이 높여야만 하는 존재이니 쉽사리 마음을 모두 열고 다가갈 순 없는 것이다. [......아니... 아닙니다, 승아님.] [다행이다. 나도 왠지 니가 느낌이 좋았거든.] 활짝 웃으며 정말 기쁘다는 듯 대답을 하는 수빈을 보니 뭔가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소연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누구세요?] 어린애 같이 묻는 수빈의 행동이 어느새 익숙해져버려 저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소연이었다. [운사입니다, 승아님.] 승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수빈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지만 수빈은 곧 표정을 풀고는 말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피부색과 잘 어울리는 갈색의 옷을 입은 지훈이 터벅터벅 들어왔다. 승아를 향하고 있던 지훈은 그 옆에 서 있는 소연을 보고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령이구나. 승아님께 식사를 올린 게냐?] [네, 운사님.] [그래. 내가 승아님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이만 방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여라.] [네, 운사님.] 소연이 방을 나가자 운사가 수빈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승아님.] [....승아라고... 부르지 마.... 고지훈... 난 그 호칭이 몸이 시릴 정도로 싫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승아님. 주군께서 내려주신 칭호니 사용하셔야 합니다.] [.............] 수빈이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내일은 주군께서 대신들에게 승아님을 소개하시고, 왕비 간택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실 겁니다. 아마도... 많은 대신들의 반대가 있을 것이고, 그들의 말 중엔 승아님이 들으시기에 심히 기분 나쁘실 말들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승아님. 기억하십시오. 승아님은 적휘국의 왕이신 주군과 그 바로 아래의 권력이 있는 저와 풍사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있습니다. 승아님은 그들이 범접치 못할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절대 그들 앞에서 기죽지 마십시오. 저와 풍사는 승아님의 발치에 저희 목숨을 던져두었으니, 조금도 주눅 드실 것 없습니다.] [....왕비는... 되고 싶지 않아....] 수빈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것을 못 들은 척, 지훈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승아님. 그럼 편히 쉬십시오.] 방에서 나오던 지훈은 벽에 기대어 수빈의 방문을 응시하는 우혁을 보고는 한숨을 쉬며 우혁에게 다가갔다. 허점투성이다. 평소엔 작은 발소리에도 반응하더니, 지금은 수빈의 방문을 보느라 다른 발소리 따윈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지훈이 어깨를 툭 쳤을 때에야 흠칫하며 정신을 차리고, 찌푸린 눈으로 지훈을 돌아봤다. [승아님은 식사 하셨냐.] [그래.] [그렇구나. 표정은 좀 괜찮으시고...?] [...........그래.. 승아님 걱정하기 전에...] 지훈은 인상을 찌푸리며 우혁을 쳐다봤다. 수빈을 만난 후로 사라졌던 미간의 주름이 만나기 전보다 더 짙게 생겨 우혁의 잘생긴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니 몸이나 좀 챙겨라. 너 지금 모습이 어떤 줄 아냐?] [내 몸은 상관없다. 승아님만 편하시다면... 나 역시 편하니...] [젠장..] 지훈은 나직하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수빈을 보는 것도, 우혁을 보는 것도 괴롭다.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롭다. [젠장..]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욕설을 중얼거리며 지훈은 선궁을 나섰다. <12> 모두 눈에서 나오는 적의를 감추지 않고 고개를 들어 수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성훈이 수빈을 비로 삼겠다 발표하자 다들 대놓고 불평을 터뜨리진 않았지만, 수빈을 쳐다보는 눈에는 적의뿐 아니라 살의까지도 가득했다. 하지만 우혁의 넓은 등을 바라보고 있던 수빈은 그들이 어떤 눈빛을 보내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만약 그들의 눈빛을 읽었더라면 오싹함이 몸을 훑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대신들의 적의 담긴 눈빛에도 이유는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자녀나 친척을 왕의 비로 삼기 위하여 수도 없이 많은 돈과 아첨을 해왔는데 왕이 왕비로 삼겠답시고 데려온 여자는 어느 집 자녀인지도 모를 근본 없는 여자이니 분하고, 원통함이 밀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쾌한 눈빛을 수빈에게 보내던 대신들은 수빈의 약간 앞쪽에 서서 싸늘하게 자기들을 내려다보는 우혁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적휘국의 비가 되실 분이다. 그 더러운 눈들을 들어 승아님을 똑바로 쳐다본다면 이 자리에서 눈을 빼내어 씹게 할 테니... 조심하여 행동하라.] 왕의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잔인한 말들로 경고를 하는 우혁은 왕보다 더 두려운 존재였기에 다들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나라의 군대가 충성을 바치는 우혁이니, 이곳에서 자기들의 눈을 뺀다한들, 우혁에겐 아무런 벌도 가해지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하오나....] 용기 있는 대신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앞으로 한걸음 나왔다. [한 나라의 비를 간택하시는 것은 국가의 대사이옵니다. 다시 한 번 고려해보시는 것이.........] [네가 지금 주군의 말씀에 거역하려는 것이냐.]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그래도 국모를 정하는 것이온데, 출생을 알 수 없는 분을 비로 택하시는 것은...] [더 이상 주군의 말에 왈가왈부하는 자는...] 우혁이 대신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망설임 없이 그 목을 베어내겠다.] 망설임 없이 목을 베겠다.. 어제... 성훈도 했던 말이다. 하지만 우혁과 더 잘 어울린다. 우혁이 한 말은 강한 마법이 되어 듣는 이의 가슴에 진하게 눌러 박힌다. 그래서 대신들이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목을 쓸어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혁은 여전히 검을 한 손에 든 채, 차가운 얼굴로 대신들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있었다. 혁아... 수빈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고개를 숙였다. [승아님. 고개를 드십시오. 이제 비가 되실 몸... 주군이 아닌 이들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수빈의 뒤에 서 있던 지훈이 허리를 굽혀 수빈의 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동 떨어진 곳에서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조금 안심이 되는 것도 같다. 그래서 가슴을 펴고 똑바로 앉아, 우혁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인 대신들을 하나하나 둘러봤지만 시선이 우혁의 뒷모습에 머물자 다시 울컥하는 심정에 눈물이 나려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우혁에게도 커다란 폐가 될 것만 같아 꾸욱 참고 당당한 척 앉아있는 수빈이었다. [오늘... 잘 하셨습니다, 승아님.] 수빈의 방 앞에서 우혁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건지... 활짝 웃으며 고마워..라고 해야하는 걸까?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우혁을 한 번 쳐다본 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보란 듯이 문을 쾅 닫아버렸다. 문을 닫아도 우혁의 향기가 남아있다. 어째서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왕비 같은 건 단 한 순간도 꿈 꿔본 적 없는데... 그냥... 그리운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고, 우혁을 만난 후엔... 그저 우혁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았는데.... 함께 도망가자 말하면 한 순간의 후회도 없이 그 손을 붙잡을 수 있는데.... 우혁은 오히려 수빈이 왕비가 되길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을 해 수빈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이 바보 이우혁!!!! 난 널 사랑해!!! 고성훈이 아닌 널 사랑한다구!!!] 수빈이 매정하게 닫고 들어간 방문 앞에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우혁은 수빈의 외침을 들으며 벽에 기대었다. 소연이 수빈의 외침을 듣고 나왔다가는 우혁을 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우혁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나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펴 하나의 놓침도 없이 모든 것을 총괄하던 우혁의 눈엔 지금 방 안에 있어 보이지도 않는 수빈의 모습만이 너무도 또렷하게 떠올라서 주위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빈....] 입안으로 수빈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제는 부를 수 없는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눈앞에 두고도,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거리에 두고도, 만지는 것조차 몸을 사려야만 하는 가슴 깊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불러본다. 차라리 보이지 않는다면 잊자, 잊자 노력해 그 모습 조금은 지울 수 있을 텐데, 앞에 두고 갖지 못 함은 생각보다 훨씬 큰 고통이 되어 다가온다. 방금 문을 닫고 들어갔음에도 수빈이 그립다. [젠장...] 많이 힘들어 질 것 같다. 우리 여린 수빈이.... 대신들의 성화에 상처입지는 않을지... 질투에 눈이 먼 궁녀들이 해코지는 하지 않을지... 잠자리를 옮겨서 몸이 불편하진 않을지... 왕궁의 음식들이 입에는 맞을지... 걱정이 태산이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걱정이 되어 편히 눈을 붙일 수가 없다. 게다가... 품 안을 가득 채웠던 수빈의 체온이 마약처럼 우혁을 중독 시켜 버려 수빈이 없이는 잠을 이루기 힘들다. 품 안에 쏙 들어와 안겨 어린아이처럼 칭얼대다가 잠들던 수빈이 없는 한은 예전처럼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우혁은 팔을 뻗어 하얀 방문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새하얀 방문에서 수빈을 느끼려는 듯, 아주 천천히 방문을 쓰다듬었다. 두 눈을 감고, 수빈을 소유하려는 듯 부드럽고 애틋하게.... 그 따사로운 손길은 마치 방문에게 생명을 주려는 듯한 성스러운 움직임처럼 보였다. [승아님....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수빈이 그리도 듣기 싫어하는 호칭을 사용해 수빈의 가슴에 한 번 더 못을 박은 우혁은 수빈 못지않은 아픔을 느끼며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승아님. 그리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소연이 가볍게 나무랐지만, 수빈은 어찌되어도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주전자를 아무렇게나 기울여 물을 따랐다. [승아님. 차를 따를 때에는 차분히 숨을 고르시어 찻물이 잔에 튀지 않도록 하시고, 찻잎이 뜨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수빈이 다시 차를 따르려는 생각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연을 쳐다봤다. [숨을 고르라.... 왜 그래야하는 건데?] [네?] [어째서 숨을 고르며 차를 따르라는 거야? 그렇게 따르면 차가 더 맛있어? 아니면 더 향긋해? 그런 거 아니잖아. 그냥.. 정신 수양을 하라는 의미에서 그런 거잖아. 근데 소연아. 난 지금 정신 수양 같은 거 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 지금..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숨을 고르며 차를 따르는 일 따위 하고 싶지 않아.] 예실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명쾌한 답이다. 누구도 왜 숨을 고르며 단정한 마음가짐으로 차를 따라야하는지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한데 수빈은 단번에 그 의미를 꿰뚫으며 자기가 차를 따르기 힘들다는 이유까지도 정확하게 말했다.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영특한 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소연이었다. 수빈은 그 자그마한 입을 살짝 내밀고, 동그란 눈에 슬픔을 가득 담은 채 소연이 따라놓은 녹색 찻물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열려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찻잔 안의 물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소연아. 날씨가... 참 좋다.. 그치?] [네에.] [난... 맑은 날이 싫었어. 맑은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여길 바늘로 꼭꼭 찌르는 것처럼 너무 아팠거든.] 수빈이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근데.... 우혀...아니.. 풍사를 만난 후엔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거야. 오히려... 맑은 날이 너무 기분 좋아서 파란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냥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어. 물론.... 함께 있은 적은 너무 적었지만........] [어찌......] [응?] [어찌 이리도 사람을 쉽게 믿으시는 겁니까. 지금 이 궁 안에는 승아님을 질투하는 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승아님은 물론... 풍사님이 많이 곤란해지신다는 것을 모르시옵니까?] 소연이 심하게 책망하자, 수빈이 눈을 크게 뜨고는 놀랍다는 듯 소연을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수빈을 질책하던 소연은 제가 한 일을 깨닫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승아님. 제가 흥분하여 망언을 했사옵니다.] [아니, 아니야. 날 생각해서 해준 말이잖아. 고마워, 소연아. 내가.. 생각이 짧았어.] 높은 직책에 머물게 된 사람답지 않게 낮은 자의 충고도 잘 받아주는 수빈을 보며 소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풍사님껜 죄송한 생각이오나.... 승아님은 타고난 왕비의 상이시옵니다. 제 가슴을 찢는 생각이긴 하오나.... 승아님의 품성은 적휘국을 평온하게 만드실 수 있을 겁니다. 폐하께선... 인재 고르시는 능력이 출중하신 모양입니다. [승아님..] 나직한 목소리에 소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예실의 문가에 우혁이 서 있었다. <13> 예실의 문가에 우혁이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검은 옷으로 온몸을 휘감은 우혁은 슬픔이 가득 회청색 눈으로 수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수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돌린 시선이 하필이면 소연과 마주쳤다. 많이 상한 우혁의 얼굴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살펴보던 소연은 우혁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승아님.] 수빈의 대답이 없자 우혁이 한 번 더 수빈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수빈은 고개를 돌려 우혁을 쳐다봤다. 많이 야위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품 있고, 당당한 자태이다. 그리하여 다들 우혁을 높이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기에...... 우혁이 제가 없는 생활을 어떻게 이어나가는지 모르는 수빈으로선 여전히 변함없는 우혁의 자태가 다행스럽게 여겨질 따름이었다. 저처럼 괴로워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수빈이었다. [승아님. 주군께서 들라 명하셨습니다.] [................] 수빈은 대답 없이 우혁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승아님.] [소연아. 나 차 따르는 거 계속 배울래. 정말 재미있다.] [그것은 나중에 배우십시오. 주군의 명령이 우선입니다.] [나가, 이우혁. 보기 싫어.] 니 얼굴만 보면... 가슴이 찢어져.. [승아님..] 제 얼굴이 보기 싫으시다면... 이 머리라도 잘를 수 있을지언데.... 어찌하여 승아님.. 제게서 고개를 돌리시는 겁니까.. [나가, 나가, 나가라구!!!!] 수빈은 참을 수 없어져 소리를 빽 질렀다. [정말 짜증나, 짜증난다구!!!!] 신경질적으로 다도상 위의 찻잔들을 전부 쓸어내렸다. 소연이 예쁘게 정리해놨던 찻잔들이 수빈의 손에 의해 바닥으로 무참히 떨어졌다. 찻잔 안에 있던 뜨거운 물들이 찻잎과 뒤섞여 바닥으로 흘러 수빈의 옷자락을 적셨다. 하얀 옷자락이 녹 빛으로 물든다. [으으... 뜨거워...... 뜨거워.....] 수빈은 피하려는 생각도 안 하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뜨겁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아... 수빈...] 급한 마음에 수빈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우혁이 얼른 달려가 뜨거운 물 사이에서 수빈을 안아드는데 수빈이 배시시 웃으며 우혁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방금... 나 수빈이라고 불렀지? 응? 헤에... 혁아.. 내 이름 불러주니까 너무 좋다...] 평소처럼 애교 섞인 목소리로 우혁에게 말했지만 우혁은 굳은 표정으로 수빈의 옷자락에서 물을 털어냈다. [죄송합니다, 승아님. 주의하겠습니다.] 혁아.... 니가.. 그렇게 말하면.. 나 너무 가슴이 아파...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모르겠어. 정말...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모르겠어.. [나 혼자 걸어갈 수 있어. 내려줘.] [먼저... 젖은 옷부터 갈아입으십시오.] [귀찮아.] [주군을 알현하실 땐.. 늘 정결하셔야만 합니다.] [난...... 널 만날 때만 정결하고 싶어.] [........승아님....] [그러니까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 둬!!]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우혁이 나직한 음성으로 소연에게 명했다. [승아님 입으실 옷을 내어오너라.] [네에... 풍사님..] 소연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방에서 물러났다. 저 두 사람.... 너무 애절한 사랑을 하는 듯 보여,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 서로 저리도 사랑하면서 사랑함을 이룰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 이 공간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서로의 모습을 너무도 애절하게 응시하는 두 사람을 보노라니 폐하에겐 죄송한 일이나 둘의 시간을 좀 더 만들어주고 싶은 소연이었다. 얼른 방에서 물러난 소연은 평소보다 더 느린 걸음으로 옷을 준비하러 갔다. 소연이 나간 후, 수빈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우혁을 올려다봤다. 우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빈이 덴 곳을 살피고 있었다. 한 번도 눈을 안 마주치는 우혁의 태도에 화가 나 수빈은 짜증스럽게 팔을 탁 쳐냈다. [아무렇지도 않아!!] [부어올랐습니다.] [됐어. 이런 걸로 안 죽어.] [왕비가 되실 몸입니다. 귀히 여기십시오.] [짜증나, 이우혁!!!]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령이 들어오면 옷을 갈아입고 나오십시오.] [니가 갈아입혀줘.] 우혁의 손길이 멈췄다. 우혁의 숨도 멈췄다. 우혁은 야속하다는 듯 수빈을 응시했다. 우혁의 회청색 눈동자에 수빈의 모습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난 다른 사람한테 내 몸 보이는 거 싫어.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내 몸을 보는 게 싫어.] 갑자기.... 어제 성훈과의 일이 떠올라 가슴이 저려왔다.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여기서 울면 우혁이 가슴 아플 거란 생각에 이를 악 물고는 참아본다. [승아님...] 제가.... 승아님의 살을 보고도... 저의 더러운 욕정을 참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왜 저를 시험하려 하시는 겁니까? 어찌하여.. 저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시옵니까? [정말... 니가 아니면 싫어.] [이미 주군의 것 아니시옵니까?] 쌀쌀맞은 우혁의 말에 억지로 참았던 눈물이 다시 비집고 나오려 하지만, 이번엔 소리치는 것으로 눈물을 대신했다. [짜증나!!! 맨날 주군주군주군!!!!!!!!] [...............] 우혁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수빈을 무릎에 안은 채 고개를 숙인 탓에 우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수빈의 가슴께에 닿았다. 수빈은 우혁의 머리카락을 쓸어 보려다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우혁에게서 풍겨오는.. 늘 수빈을 편안하게 해주었던 그 시원한 향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소연이 들어왔을 때, 소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왕비될 사람을 지키는 신하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늘어져있는 한 여인과 붙잡지 못하는 운명을 한탄하며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 머리를 묻은 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소연은 이런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여 고개를 들렸지만 정작 우혁은 천천히 일어나 수빈을 내려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빈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승아님. 옷을 갈아입고 나오십시오.] 천천히 걸어 나가는데도 차가운 바람에 살이 에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괜히 풍사란 호를 얻은 것이 아닌 모양이다. 수빈의 커다란 눈동자는 이미 나가버린 우혁을 한가득 담은 채 문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승아님..] 불러 봐도 아무런 대답이 오지 않는다. 소연이 가만히 수빈의 옆으로 다가가 젖은 옷을 벗겨내고 물수건으로 몸을 닦은 뒤 새 옷을 입힐 때까지도 수빈의 눈은 우혁과의 사이에 놓인 문을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저... 승아님...] 옷을 다 입히고 수빈을 불렀을 때, 소연의 예상과는 달리 수빈은 얼른 반응했다. 뭐가 그리 불만인지 입술을 삐쭉 내밀고 있던 수빈은 고 예쁜 입술을 열어 소연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네?] [나... 우.. 아니.. 풍사랑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그냥... 내가 자꾸 화내니까... 풍사가 다 자기 잘못이라면서 고개를 숙인 것뿐이야.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어. 그러니까... 사람들한테 이상한 소문 내지마. 부탁이야. 그런 소문내면... 우리 혀...아니.. 풍사... 왕이 죽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말하지 말아줘..] 아까 다도를 배울 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힘겹게 말을 이어 우혁을 옹호한다. 이리도 가슴 아프게 서 있는 수빈에게 소연이 달리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소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승아님. 걱정 마십시오. 소녀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듣지 못 하였사옵니다. 소녀... 늘 승아님의 편이오니... 걱정 마십시오.] 수빈이 부드럽게 웃었다. [고마워, 소연아.] [옷.. 다 되었습니다. 폐하를 알현하고 오십시오.] 뭔가 다른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달리 해줄 말이 없어 수빈이 듣기 싫었을 말을 하고 말았다. 조금 환해진 듯 싶었던 수빈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아아... 응.. 그래야하지... 그래.. 그럴게. 있다가 보자..] 비틀거리며 문을 나서는 수빈의 뒷모습을 보며 소연은 쓰러지듯 벽에 한 손을 짚었다. 승아님... 승아님께서 그리도 싫어하시는 분이... 제가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분입니다. 제가 그리도 받고 싶은 사랑을 승아님은 어찌 그리 거부하시는 겁니까.. 승아님과 풍사님의 사랑 모르는 건 아니오나.... 이기적인 전.... 폐하의 사랑을 받는 승아님이... 한없이 부럽사옵니다. <14> 내실까지 가는 동안 수빈과 우혁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우혁은 묵묵히 수빈의 뒤를 따르고 있었고, 수빈은 수빈대로 주먹을 꽉 쥐고 걷고 있었다. 마침 내실 문 앞에 서 있던 지훈이 승아를 보고는 벽에서 떨어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 지훈의 행동에 수빈은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알현.......] 우혁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수빈은 싸늘하게 문을 닫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 보상받지 못할 사랑... 자꾸 매달리고 안겨봤자 우혁만 더 괴로워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풍사...] [.....주군은.... 건강하신가?] [지금... 주군 걱정 할 때냐?] [주군과 승아님이 건강하시면... 난 그것으로 됐다.] [헛소리 좀 하지 마. 니 건강도 좀 챙기라구!!!] [나의 건강... 나의 건강이라..... 그게.... 지금 나에게 무슨 소용이지? 남은 것도 없는 내가... 건강을 지킬 들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거지?] [풍사...] [운사. 난... 난 정말 견딜 수가 없다. 때로는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괴롭게 느껴지는 법이지. 지금.. 나의 삶이 그렇다. 하루하루를 살아감이 연옥에 있는 것만 같이 괴로워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차라리... 차라리 죽는다면.... 이 가슴의 고통.. 조금이라도 나아질 텐데...] [너.. 이렇게 약한 인간이었냐?] [.....그래.. 그랬던 모양이다.] [풍사.. 너.....] 우혁에게 뭔가 말을 하려던 지훈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했다. 힘겹게 서 있던 우혁이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지훈을 향해 꼬꾸라졌기 때문이다. 당황하며 우혁을 부축한 지훈은 우혁이 저보다 키가 큰지라 끙 소리를 내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최근 음식도 제대로 안 먹고, 수면 부족인데다가 스트레스를 받던 우혁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몸이 많이 상하고 말았던 것이다. [야, 혁아.. 괜찮냐?] 마음이 급해서 궁 안에선 안 쓰는 우혁의 이름을 부른 지훈은 인상을 찌푸리며 지나가는 궁인을 불러세웠다. [풍사님께서 쓰러지셨다. 어서 들 것을 가져오너라.] 놀란 눈으로 우혁을 살피던 궁인이 다급히 뛰어가는 것을 보며 지훈은 우혁을 부축한 채 벽에 기대었다. 우혁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어쩌려는 거냐... 우혁아... 너... 정말.. 죽을 생각인 거냐...] [앞으로 내가 보고 싶으면 니가 직접 와!!!] 인상을 찌푸리고 당돌하게 말하는 수빈의 모습에 성훈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목이 떨어져 나갈 만큼 버릇없는 행동이지만 이런 행동을 하는 수빈은 너무도 사랑스럽다. [웃지 마, 보기 싫어.] [궁의 예법은 많이 배웠느냐?] [죽지 않을 만큼은 배웠어.] [하지만 네가 하는 행동은 배운 사람이 하는 행동 같진 않구나.] 성훈이 웃으며 수빈의 머리를 쓸어 넘기자 수빈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옮겨 앉았다. [짜증나. 들러붙지 좀 마.]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는 성훈을 똑바로 쳐다본다. 이런 다리는 꼬는 행동은 처음 봤거니와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는 사람도 처음이기에 성훈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대체 왜 부른 거야?] 수빈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매혹적으로 움직였다. 성훈은 일어나 수빈의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수빈의 턱을 올려 수빈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보고 싶어서.....] [그럼 건드리지 말고 보기만 해.] [보면 건드리고 싶어지는 것 아니겠느냐.] [난 누가 내 몸 건드리는 거 싫어해.] 수빈이 미간을 좁히며 성훈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누가 만지는 건 정말 싫다는 듯 몸을 잔뜩 움츠린 수빈을 번쩍 안아든 성훈은 침대로 가서 수빈을 눕혔다. 수빈은 입을 꼭 다물고 옆에 있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별로...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더군.] [정말... 싫어...] 성훈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수빈의 매끈한 목을 쓰다듬었다. 눈을 질끈 감았던 수빈은 갑자기 성훈의 손가락을 탁 쳐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곤 허리에 손을 얹은 단호한 자세로 성훈에게 말했다. [좋아. 내가 보고 싶다거나, 내 생각이 난다거나... 그런 너의 마음 이해하도록 노력해볼게. 하지만 날 창녀 취급하진 말아줘. 지금까지 너의 생활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난 니가 부를 때마다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그런 같잖은 여자가 되고 싶진 않아. 난 너와 결혼을 하기로 했으니 너한테 안겨주기는 해야겠지. 하지만 정 내가 안고 싶다면 일정한 시간에 날 불러. 그럼 두말 않고 너에게 안길게.]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광쟁이인 줄만 알았는데 놀라울 정도로 도도하고, 생각이 깊다. 게다가 왕의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이 태도... 조금만 다듬으면 양갓집 규수 못지않게 될 것이다. 볼 때마다 매력의 깊이가 더해간다.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좋다. 그리하도록 하지. 앞으로 밤엔 나의 잠자리 시중을 들도록 하라. 왕비가 될 준비가 끝나면 곧 식으로 올리도록 하겠다.] 수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성훈을 한 번 흘겨봤다. [그럼 나 나간다.] 이제는 웃어주지 않는 우혁이지만, 이제는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우혁이지만... 그 차가운 얼굴이나마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바쁘게 걸음을 옮긴 수빈이었다. 이 문을 열고나서면 비록 웃음기 없는 우혁이라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수빈이기에 문을 열었을 때 그 앞에 있는 것이 우혁이 아닌 지훈임에 느끼는 실망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훈은 여전히 장난끼 가득한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혁을 볼 수 없어 너무 실망스럽지만 그래도 지훈의 얼굴을 보니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답답함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다. 청색의 옷을 입고 칼을 옆에 찬 지훈은 귀염성 있는 눈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풍사가 아니라서 실망하셨습니까, 승아님.] 경칭을 쓰고 있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장난치는 듯한 지훈의 말투에 조금은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 수빈은 굳어있던 얼굴에 부드럽게 미소를 올렸다. [그래, 실망했다.] [후후.. 그러셨군요. 풍사는 잠시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웠습니다.] 수빈이 물끄러미 지훈을 응시했다. 속쌍거풀이 진하게 진 수빈의 눈에 미소 짓고 있는 지훈이 들어왔다. [앞으로도.... 너무 날 지키러 따라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해. 풍사는 바쁜데... 나까지 지키려면 많이 피곤할 거야. 난 풍사 없어도.. 령이 있어서... 혼자 잘 해나갈 수 있으니까... 이제 오지 말고... 몸 좀 추리라고 해.] 그리곤 몸을 돌려 걸어가는 수빈을 따라가며 지훈이 투덜대듯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십시오, 승아님. 속으로는 그를 간절히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가 더욱 승아님을 놓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훈의 말을 듣던 수빈이 걸음을 멈췄다. 뒤따라오던 지훈도 걸음을 멈췄다. 수빈은 한동안 말이 없었지만 지훈은 조금도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선 채 수빈이 어떤 행동이든 하길 기다렸다. [내가........ 그를 곤란하게 하는 걸까?] 늘 맑았던 목소리가 탁하게 들려온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어째서!!!!!!!] 수빈이 목소리를 높이며 지훈을 돌아본 덕에 주위를 지나가던 궁인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둘을 쳐다봤다. 물론 소란의 인물이 지훈과 수빈이란 걸 알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진정하고 방으로 드십시오. 이곳엔 보는 눈이 많습니다. 승아님.] [.................] 지훈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둘의 분위기가 심상찮다고 느낀 궁인들이 몸을 한껏 움츠리곤 소리 없이 지나가는 바람에 그곳엔 수빈과 승호의 발자국 소리만이 너울거리며 울려 퍼졌다. [어째서, 어째서 내 행동이 혁이를 곤란하게 한다는 거야!!! 내가 자초한 일도 아니잖아. 누가 왕비 따위 되고 싶대? 난 그저 우혁이랑 둘이 오순도순 살고 싶었다구.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바란 것 없었어. 그냥...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방에 들어서자마자 수빈은 지훈에게 달려들 듯 물었다. [승아님의 이런 행동이 풍사를 곤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15> [승아님의 이런 행동이 풍사를 곤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멱살이라도 쥘 듯 지훈에게 다가갔던 수빈이 지훈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훈을 올려다봤다. [내 행동이 뭐가 어때서?] 금방 슬픈 표정으로 돌아간 수빈을 보며 너무 차갑게 말한 것을 후회하는 지훈이었지만 그래도 우혁과 수빈을 위해서라면 누군가가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둘의 모습은 정말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만큼 처량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승아님께서 원치 않으신 일이란 것.. 이 운사... 알고 있습니다. 승아님께서 왕비는커녕... 왕궁의 생활조차 꿈꾸지 않으셨다는 것.. 그저 풍사만 곁에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셨다는 것..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이런 말 입에 올리면 안 되지만... 승아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분이 주군이 아닌 풍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승아님. 풍사가 그리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왕궁에 발을 들인 것이 누구입니까?] [................] 수빈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주군께 선택되신 몸입니다. 이제는 되돌리고 싶어도 되돌릴 수 없는 일입니다. 서로가 아무리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해도 이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투정을 부리고, 풍사를 원해도.... 이제는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건... 승아님께 주어진 운명입니다.] [승아란 소리 집어치워.] [마음속에... 승아님의 이름을 담고 있겠습니다. 물론 풍사도 그럴 테지요. 하지만 주군께서 승아라 부르라 명하셨으니...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 [이제... 왕비가 되실 몸입니다. 마음이 원하지 않아도 그리하셔야하는 몸입니다. 힘드실 거란 거 압니다.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품고도 다른 이의 품에 안겨야 함이 괴로우시리란 거... 압니다. 승아님의 귀한 마음 가득 차지한 것이 다른 사람이란 것 압니다. 하지만 승아님. 견뎌내셔야 합니다. 뼈를 깎는 고통이 있어도 참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풍사를 위하는 길입니다. 진실로 풍사를 위하신다면... 그를 사랑하신다면... 이제... 왕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십시오. 자꾸만 이렇게 어린 아이처럼 투정부리고, 궁 안의 사람들을 적으로 돌린다면.... 힘들어지는 것은 승아님을 지키는 풍사입니다.] 수빈이 털썩 침대에 주저앉았다. 조금 차가운 듯한 지훈의 말은 계속되었다. [비록 육체적인 사랑을 할 수 없으나...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할 수는 없으나.... 풍사의 마음은 승아님에게로 향해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평생을 승아님을 위하여 바치겠지요. 그러니... 승아님은 최고의 왕비가 되어 그 이름을 길이 빛내십시오. 그런다면... 풍사도... 저 운사도... 그걸로 기쁠 것입니다. 변한 것은... 더 이상 만지지 못 한다는 것과.... 소리 내어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존귀하신.. 승아님... 최고의 비가 되어 그 이름을 빛내십시오. 제 마음은 끝까지 승아님의 친구일 것이로되... 승아님이 가장 힘들 때에 승아님의 눈물을 닦아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풍사의 마음은 끝까지... 승아님의 연인일 것이니.... 승아님이 한없는 외로움에 잠겼을 때에.... 그 마음만으로도 승아님을 따뜻함 속에 머물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승호는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수빈의 방에서 나왔다. 하지만 먼 곳으로는 가지 않았다. 우혁이 의원에게 실려 가는 중에도 절대 수빈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것이다. 때로는... 아주 때로는... 이렇듯 슬프고 애절한 사랑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는 존재하지 않았으면 싶을 만큼 슬프고 애절한 사랑...... 수빈과 우혁이 나간 후, 령은 예실에 잠시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령님. 나오셨습니까.] [아.. 세야. 어찌 알고 오셨습니까?] [저야.. 늘 령님을 따르지 않습니까.] 소연의 초췌해진 모습을 본 세야가 일부러 밝게 말하며 소연의 뒤에 섰다. [후후.. 그러한가요? 잠시... 바깥바람을 쐬고 들어오십시다.] 바깥은 여전히 맑은 하늘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기 직전의 나뭇잎들은 막바지에 이르러 불타오르는 예술 혼처럼 아름다운 빛깔을 자랑하며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하아....] 아름다운 단풍들을 보면서도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령의 기분을 알고 있는 세야는 령에게 아무 말도 붙이지 않고 묵묵히 령의 뒤를 따랐다. 성안을 거느리다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궁녀들이 잠시 나들이를 나온 모양이었다. 다들 왕을 모시는 궁녀답게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로 한껏 치장을 하고는 뭔가 대화를 나누며 령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보다 신분이 높은 령을 보고는 얼른 대화를 멈추며 예를 표했다. [령님.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네, 저야 늘 그러하지요. 다들 나들이 나오신 모양입니다.] [네에. 날씨도 좋은데 이런 날 방에 있어봐야 누가 불러주기라도 하겠습니까. 저희들끼리 입을 맞추어 바깥나들이를 나왔습니다.] 궁녀 하나가 수다스럽게 말했다. [령님, 혼자 다니시는 거면 저희와 합류하시지요. 령님이 함께 자리해주시면 저희로선 참 영광일 것입니다.] [후후.. 그럼.. 혼자 거니는 것도 적적하니... 그리하도록 해야겠군요.] 소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과 함께 가을의 정취를 즐겼다.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꽃을 피우던 궁녀들이 문득 수빈의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다. [그런데 폐하께서 왕비로 간택하신 승아님 말입니다. 어째서 우리들에게 인사 한 번 안 하시는 겁니까? 어제 잠시 뵈러 찾아갔는데...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면서 문전박대나 하시고..] [궁 생활이 처음이라.. 많이 피곤하셔서 그런 것일 겝니다.] 소연이 수빈을 두둔하고 나섰다. [아무리 피곤해도 이건 경우가 아니잖습니까. 저희가 무슨 몇 시간 함께 있으려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문안 인사나 드리려고 했던 것인데... 너무 거만하신 것 같습니다.] [아직.. 적응 못 하셔서 그런 것입니다. 전혀 거만하신 분 아닙니다.] [물론 령님이야 워낙에 사람이 좋으시니 어떤 분이 어떤 행동을 하셔도 모두 좋게 보이시겠지만... 저흰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령님께선 지식도 많으시고, 됨됨이도 좋으시고, 게다가 출생까지도 흠잡을 곳이 없으신데... 어째서 왕비 간택에서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여자를...]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소연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제제를 가했다. 갑자기 수빈이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원하지 않는 왕비가 되어 사랑을 잃은 것으로 괴로워하고, 그리 괴로우면서도 또 욕을 먹어야 하는 수빈이 안타까워진 소연이었다. [승아님은.... 모두 한 번씩 뵙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실 겝니다. 육체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아랫것을 생각하는 마음가짐 또한 왕비 됨에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갑자기 바뀐 생활로 많이 혼란스러워 여러 궁녀님들 마음에 탐탁찮게 보이는 부분도 많겠으나, 아마 적응하신다면 아주 빼어난 왕비가 되실 겝니다. 그러니.... 승아님을 너무 나쁘게만 보시 마십시오.] 궁녀들은 수긍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쭉 내밀었지만, 소연의 말에 반박하지는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치맛자락만 만지작거렸다. [그럼... 전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모두 말씀들 나누십시오.] 살짝 인사하며 돌아가는 소연의 뒷모습을 보며 한 궁녀가 다른 궁녀들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령님은... 정말 속도 깊으십니다. 지금 누구보다도 힘드신 것은 령님이실 텐데....] [설마 글을 읽지 못하시는 겁니까?] 여럿이 둘러 앉아있을 때였다. 우혁과 지훈이 보이지 않아 수빈을 깎아내릴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보던 대신들이 국사가 적혀있는 문서를 하나 수빈에게 건네고는 수빈이 그것을 읽지 못하자 반쯤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아니, 어찌 나랏말 하나 못하신단 말입니까. 물론 승아님께서 누구보다도 아름다우신 건 인정하겠으나, 나라의 왕비라는 것이 외모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성훈이 수빈의 옆에 있긴 했지만 대신들에겐 두려운 것이 없었다. 어차피 적휘국의 최고 권력자는 우혁.. 아무리 우혁이 성훈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해도 성훈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성훈은 왕이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하지만, 왕의 호위관인 우혁으로선 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그저 왕의 신변에 위협이 되었기에..라고 말하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우혁에게 잘못 보이면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갈 테지만, 대신들의 기분도 생각해야하는 성훈이 자기 기분이 나빠졌다고 대신들의 목을 베는 일은 결단코 없을 테니 성훈을 두려워할 턱이 없었다. 성훈 역시 당혹스러운 듯 했다. 아무리 출생이 어딘지 모르는 여자라도 일단은 나라의 일등 공신인 우혁이 데리고 있던 아이이니 적어도 글 정도는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수빈의 나쁜 점을 잡아 깎아내리려던 대신들에게 좋은 빌미를 하나 더 안겨준 셈밖에 안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회의에 데리고 나오는 것이 아닌데....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과 여러 가지를 연습시킬 생각에 이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회의에 데리고 온 터였다. 한데... 글을 읽지 못한다니.... 성훈은 인상을 찌푸렸다. 답답하기는 수빈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시대의 한문인지는 모르지만 지금과 약간은 다른 것이 안 그래도 한문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는데 더더욱 모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원래 한 독서 하던 몸인데... 글을 못 읽는 걸로 비웃음을 사다니... 화악 세종대왕의 업적을 가로채, 지금 한글을 만들어낼까..하는 생각까지 하는 수빈이었다. 대신들의 비난의 시선이 수빈의 몸을 시리게 만들었다. 아무리 국가 제일의 신분인 성훈이 옆에 있어도 정말 의지가 되는 것은 우혁과 지훈이었기에 그들이 없는 지금 이곳에 앉아있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다. 적의를 담고 있는 대신들의 시선도, 비웃음을 머금은 대신들의 얼굴도.... 전부 다 싹 지워버리고 싶다. 하지만 이곳에서 발악을 하며 일어나면 곤란해지는 것은 우혁이다. 우혁만 대신들을 진정시키느라 더 힘들어질 것이다. 최고의 왕비가 되자. 그래서 우혁의 괴로움을 보상받도록 하자. 수빈은 속으로 다짐했다. 목표가 있으면 사람이 강해진다고 했던가. 조금 전까지 안절부절 못하던 수빈은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우며 대신들을 하나하나 둘러봤다. 수빈의 눈길을 받은 대신들은 아무리 수빈에게 적의를 담고 있어도 아름다움을 보면 흥분하는 남자인지라 침을 꿀꺽 삼키며 얼굴을 붉혔다. 이 정도의 미모라면 그 미모만으로도 대국의 왕비가 되는 것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신들이 수빈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자 수빈은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네. 전 아는 것이 없어 글조차 읽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찮은 생각이나마 가지고 있으니 지혜로우신 대신께서 제게 그것을 읽어주신다면 마음에 새겨두고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이란 것이 차 따르는 것과 같이 하찮은 것으로 생각되어 아직 깊이 배우지 않았지만 굳이 배워야하는 것이라면 일주일 이내에 배우도록 하겠으니, 지혜로우신 대신들께서는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경칭을 꼬박꼬박 써가며 듣는 이를 한껏 높여 이야기하는데 뭐라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대신은 과찬의 말씀이라는 둥의 말을 중얼거리며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자고 말했다.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성훈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래서 안 되는 거야..] 성훈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 성훈은 고개를 돌려 수빈을 쳐다봤지만 수빈은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꼭 다물고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래서 넌 안 되는 거야, 고성훈. 우혁이었으면... 이 상황에서 내가 글을 못 읽었더라도 너처럼 어두운 얼굴 안 해.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날 옹호해줬을 거야. 만약 혁이가 아무 것도 없고,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었더라도... 난 혁이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야. 그게 바로... 우혁이와 나의 사랑이야. 알겠어, 고성훈? 그래서 넌 안 돼. 너에게 난...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장식품이 뿐이야. 너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도구.. 그리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장식품...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싫증나면 돌아보지도 않을..... <16> 지긋지긋한 한자 공부..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르겠다. 소연이 잠시 불공을 드리러 간 탓에 수빈의 한자 교육은 다른 궁녀가 맡아서 하고 있었다. 그 궁녀는 수빈이 왕비로 간택되었다는 게 어지간히 불만이었는지, 처음 시작하는 날부터 늘 투덜댔었다. 지긋지긋해... 하지만 이 공부가 끝나고 나면 문 밖에 있는 우혁과 함께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은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지루함을 떨쳐버리고 좀 더 집중하려 애써본다. 이제 4일이 지나면 약속한 일주일... 약속대로 한자를 전부 터득하지 못해서 우혁이 욕을 먹는 일이 생기는 것은 싫다. [대체 왕비가 된다는 분이 어떻게 글도 못 읽을 수 있죠?] 벌써 몇 번째나 투덜거리는 말인지 모르겠다. 이 궁녀.. 화려한 장신구들로 온몸을 치장한 걸 보니 소연 못지않게 귀한 집 딸인 것 같다. 수빈은 무시하며 방금 외운 글자를 다시 한 번 눈여겨봤다. [어떻게 글 같은 걸 모를 수가 있죠? 아무리 적게 봐도 16살 이상은 되어 보이는데...] [조용히 좀 해, 헷갈리잖아.] [단순한 예절을 익히는데도 이렇게 힘이 드니... 어디 왕비와 같은 직분에 오를 수 있으시겠습니까? 정말.. 령님만 불쌍한 따름이지요.] [령이 왜?] [어머? 모르신다는 말씀은 안 하시겠죠? 승아님이 왕비로 간택되기 이전까지는 령님이 폐하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어요. 령님은 정말 폐하만 바라보면서 사셨는데......] 수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정말이야...?] [네. 어떻게 그렇게 시치미를 뚝 떼실 수 있나요? 령님께서 폐하를 목숨처럼 여김은 온 성내 사람이 다 아는 일인데....] [아....] 그럼.... 그럼.... 소연인 자기 가슴도 그리 아프면서... 늘... 날 위로해주고... 날 챙겨준 거란 말이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뺏은 날...? 궁녀가 정말 앙큼하기도 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정말 모르셨단 말입니까?] [.......시끄러워. 얼른 이거나 가르쳐줘. 너랑 이런 잡담하려고 만나는 거 아니잖아.] 수빈이 싸늘하게 말했다. 기품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수빈의 말에 궁녀가 화가 난 듯 눈썹을 세웠다. [뭐라구요? 하아~ 정말.. 기품이라곤 전혀 없으시네요. 정말.. 왕비가 될 자질이 없으세요. 얼굴만 예뻐서야 유곽에서나 일 할 수 있죠.] 이상하게도 유곽이란 말이 신경을 건드린다. 수빈은 미간에 주름을 모으며 궁녀를 쳐다봤다. [내가 보기엔... 니가 더 유곽에서 일할 것 같은데...? 난 지금 하나도 꾸미지 않았다구. 하지만 넌 목걸이에 귀걸이에 반지에.... 난 그냥 날 때부터 예쁜데 어쩌라는 거야? 이 얼굴 뜯어 고치기라도 하라는 거야?] [뭐.. 뭐라구요!!!] [예절... 기품.. 그래, 다 좋아. 그런데 말이야. 그런 건... 평소에도 흘러넘쳐야 하는 것 아냐? 남의 꼬투리나 잡아서 사사건건 시비 걸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예절 따위나 몸에 달고 사는 이런 너의 모습이 더 추접스러워.] [정말... 이래서야 구제할 수가 없는 분이네요.] [나한테 말 함부로 하지 마. 난 상관없지만... 우.. 아니.. 풍사가... 나에게 말 함부로 하면 목을 베겠다고 했거든.] [...............] 그래도 우혁은 두려운지 우혁의 호가 거론되자마자 잠잠해지는 궁녀였다. 하지만 여자의 질투심이란 입을 가만히 있게 만들지 못하는 모양이다. 한동안 묵묵히 수빈이 글 연습하는 걸 지켜보던 궁녀가 결국 자기에게 큰 해가 될 말을 내뱉고 말았던 것이다. [어머? 그러고 보니... 풍사님과 내연의 관계란 소문이 있던데.... 다른 이에게 몸을 준 그런 더러운 몸으로 왕비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건가요?] 수빈이 벌떡 일어났다. 궁녀는 수빈이 한 대 치려는지 알고 움찔했지만 수빈은 더없이 환한 미소를 보여주고는 방에서 나갔다. 잠시 후, 겁에 질린 궁녀의 목을 한줄기 빛이 갈랐다. 옆에서 보던 승호가 말릴 틈도 없었다. 모두 [앗!!]하던 틈에 생긴 일이었다. 아마 수빈도 우혁이 그녀의 목을 정말로 베어내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차가운 우혁의 표정은 궁녀의 목이 굴러 발 앞에 떨어질 때까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빠르고 정확한 솜씨 덕에 핏방울조차 묻지 않은 칼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우혁이 그 서늘한 눈길로 주위를 돌아봤다. [앞으로 승아님을 욕되게 하는 자가 있으면 이리 될 것이다.] 나직한 목소리로 주위를 준 우혁은 한 손으로 피가 튄 옷자락을 탁 치고는 깨끗하게 뒤로 돌아서서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우혁이 나가고 나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차마 깨닫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궁녀가 이젠 피를 흘리는 고깃덩이가 되어 온갖 비싼 장신구들과 함께 핏물에서 뒹구는 것은 그 안을 아비규환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아!!!!!!!] 궁녀들이 입을 가리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안으로 들어온 무장들이 때 아닌 살인사건에 놀란 듯 당황하며 궁녀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공포에 휩싸인 궁녀들은 무장들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이리저리로 무질서하게 뛰어다닐 뿐이었다. [다들 소란을 멈추어라!!!!!!] 지훈의 우렁찬 목소리가 그들을 멈추게 만들었다. [아.. 운사님.] 무장들이 지훈에게 고개를 숙였다. 궁녀들은 여전히 떨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지훈에게 예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궁녀의 시체를 한 번 보고는 무장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자초한 일이니 크게 문제 삼지 마라.] [하지만... 대체 누가.....] [풍사님께서 하신 일이다.] 우혁의 호가 나오자 다들 조용해졌다. 왕보다 더한 권력을 손에 쥐고도 왕에게 충성을 바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 그가 한 일이라면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게다가 우혁은 왕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동정 없이 칼을 움직이는 냉혈한이라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궁녀가 왕에게 안 좋은 행동을 했다면 이런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다. [전에 풍사님께서 하신 말씀 새겨들었느냐? 풍사님은 분명 승아님을 욕 되게 하는 이는 가차 없이 목을 베어내시리라 말씀하셨다. 때문에 풍사님께선 그분이 진작 말씀하신 일을 실행으로 옮긴 것뿐이니 더 이상 이 일로 왈가왈부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너희들도........] 지훈이 궁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승아님을 귀이 모시도록 하여라. 땅에도 귀가 있고, 벽에도 눈이 있는 법이다. 언제 어느 때든 소문이 퍼지기 마련이니, 몸가짐을 바로 하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들릴 듯, 말 듯한 궁녀들의 대답을 들으며 지훈은 그들을 조용히 시키느라 빼들었던 칼을 도로 안에 집어넣고는 우혁이 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성훈의 귀에 안 들어갈 리가 없었다. 아무리 우혁에게 사람을 죽이고 살릴 권한을 주었다지만 궁내에서 함부로 칼을 휘둘렀다가는 큰 항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미리 조심하자는 차원에서 우혁을 호출했다. 궁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수빈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훈의 옆에 앉아있었다. 정말로 우혁이 궁녀의 목을 벨 줄은 몰랐던 수빈은 죄책감 때문에 가슴이 조여 왔다. 혁이가... 나 때문에 사람을....... 경민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우혁이 보인다. 눈을 살짝 가리는 짙은 색의 머리카락... 부드러워 보이는 그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었다. 분명 예전처럼 물이 흐르는 듯 부드러운 느낌일 것이다. 한데.. 저 넓은 어깨는... 왜 저리도 슬퍼 보이는 것일까. [풍사..] 이윽고 성훈이 입을 열었다. 비통한 어조였다. 우혁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성훈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금 전.. 위화 장군의 둘째 딸인 현의 목을 베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것이 사실이냐?] [그녀가 누구의 딸이던, 그녀의 이름이 무엇이던.. 그것은 저와 관계없습니다. 하지만 이 궁 안에서 한 궁녀의 목을 벤 것은 사실입니다.] [어째서... 그리한 것이냐.] [제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승아님을 욕되게 하는 자는 망설임 없이 베겠다고... 전 저의 말을 실행한 것뿐입니다.] 우혁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혁의 말은 곧 법... 지금 우혁의 말엔 그런 자신감이 서려있었다. [하지만... 너무 심하지 않았느냐..] [주군.. 이것 아십니까? 때로는 마음의 고통이 육체의 고통보다 훨씬 괴로울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승아님의 마음에 큰 고통을 주었고, 승아님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혔습니다. 주군께서 제게 승아님을 목숨처럼 지키라 명하신 이상... 전 승아님께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히는 자는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주군의 승아님은.... 누구보다도 귀할 가치가 있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한 일이 잘못된 일이라면 이 자리에서 제 목을 베어주십시오.] 주군의 승아........ 늘 성훈에게 짧게만 대답하던 우혁이 오늘은 뭔가 가르치듯 길게 이야기 하여, 좌중에 서 있는 대신들이 놀란 것은 수빈에게 있어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우혁이 칼을 빼들고 성훈에게 협박을 하던, 여기 있는 대신들의 목을 다 베어버리던... 그것은 수빈에게 아무런 감흥도 되지 않았다. 단지.... 주군의 승아라니...... 그 몇 개의 단어가 수빈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갈가리 찢어 바닥에 던져, 짓밟고, 또 짓밟아 수빈을 수빈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다. 주군의 승아...... 수빈은 양팔로 몸을 감쌌다. 갑자기 오한이 덮쳐 왔다. 주군의 승아...... [내.. 어찌 너의 목을 벨 수 있겠느냐. 단지... 앞으로 이런 극단적인 행동은 자제해주길 바란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주군.] [그래. 물러가거라. 다들 물러가거라. 혼자 있고 싶구나.] 우혁이 나가는 것을 선두로 모두 웅성이며 우혁의 뒤를 따라나섰다. 멍하니 앉아있던 수빈도 몸을 일으켰다. 성훈이 뭐라 했는지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우혁이 멀어져 가기에 본능적으로 우혁을 잡으려 일어선 것뿐이다. 우혁만을 그리는 우혁바라기인마냥 앞만 보며 걸어가는 수빈의 모습에 성훈은 착잡함을 느꼈다. 수빈만은 함께 있어주길 바랬지만 굳이 잡지는 않았다. 우혁이 수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수빈이 우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안다. 아마도 이 궁안의 사람들이 전부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사실이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빈을 가지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보면 볼수록 빛이 나는 수빈을 소유하고 싶었다. 한숨을 내쉬며 앉아있을 때, 수빈은 우혁을 따라 성훈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새로운 벽이 하나 놓였다. <17> 수빈이 우혁의 옷깃을 붙잡자, 우혁이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우혁의 눈동자가 너무 슬퍼보여서 투정을 부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우혁은 수빈을 향해 웃어보려 애썼지만, 그 어색한 웃음은 우혁을 더 슬퍼보이게 할 뿐이었다. 우혁은 곧 웃으려는 시도를 관두고는 약간은 냉소적인 모습으로 수빈을 응시했다. 한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둘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보였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수빈에 비해, 우혁은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밝은 갈색의 수빈의 머리카락은 우혁의 짙은 고동색의 머리카락을 따라잡지 못했다. 쌍거풀이 진 동그란 눈의 수빈의 눈과 쌍거풀 없이 날카로운 듯한 우혁의 눈은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지금 둘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마치 동일인물인 것처럼...... 우혁에게 무슨 말이든 하려고 뒤따라온 지훈도 그것을 느꼈는지 입을 다물곤 자리에 멈춰서 그들을 지켜봤다. 긴 침묵.... 그리고..... [그거 알아?] 수빈의 작은 목소리가 우혁을 할퀴듯 울렸다. [지금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건 바로 너야. 이.우.혁. 다른 사람의 작은 모욕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야. 넌 그런 고통이 고통도 아니게 여겨질 만큼.. 내 가슴을 갈가리 찢어서 죽이고 있거든.] 우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변하는 우혁의 가슴을 툭툭 친 수빈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죽지는 마. 그러면.. 나도 죽을 거거든. 반드시.....] 정말이야, 혁아. 나... 정말 니가 죽으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널 따라갈 거야. 재수 없는 고성훈은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한다 했지만... 난... 반드시 널 따라갈 거야. 니가 아무리 세상에 남아 달라... 너 대신 행복해져 달라 부탁해도... 난 반드시 널 따라갈 거니까.... 그러니까... 그냥 내 곁에만 있어줘. 나.. 욕심 부리지 않을게. 나의............ 사랑하는 혁아......... 성훈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응시했다. 어떻게든... 수빈을 소유해야만 한다. 수빈이 아직도 우혁에게 목메는 것은... 우혁에게 적절한 여자가 나타나지 않아서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혁이 다른 여자와 혼례를 올린다면, 수빈은 분명 돌아설 것이다. 우혁을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손가락을 움직이던 성훈이 옆에 서 있던 궁인에게 명했다. [어제 령이 불공을 끝내고 돌아왔을 것이다. 령과 풍사... 그리고 승아를 이리로 들라 명하라.] 수빈은 소연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불공을 드리고 돌아온 소연은 조금 지쳐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개운한 표정이었다. 시무룩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수빈을 황망히 모신 소연은 얼른 의자를 내어주고는 수빈이 앉자 자기도 그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수빈이 자리를 권하지 않아도 자리에 앉을 만큼 수빈과 친해진 터였다. [저기....... 소연아.....] 수빈이 길게 끌며 소연을 불렀다. [네, 승아님.] [.........미안해.......] 갑작스런 수빈의 사과에 당황한 소연이 눈을 크게 뜨고 수빈을 응시했다. [그게 무슨......] [....너.... 니가... 성훈이 좋아했었다면서.....] [아...... 그걸.. 누구에게.....] [...........................] 수빈은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승아님...] 수빈은 슬픈 듯 주먹을 꼭 쥐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소연을 응시했다. 물기 젖은 수빈의 눈동자에 소연이 한가득 들어찼다. [승아님. 저에게 죄송해하실 것 하나 없으십니다.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그리고... 승아님께서 폐하를 모셔간 것이 아니라... 폐하께서 승아님을 선택한 것 아니십니까. 전혀... 죄송해하실 것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하지만.....] [승아님. 괜찮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내가 미안한 건... 그게 아냐.] [네?] [내가 미안한 건.. 정말 미안한 건... 나... 내 슬픔에만 신경 쓰느라... 너의 슬픔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거야. 넌... 그렇게 가슴이 아프면서도 날 챙겨줬는데.... 난 내 슬픔만 챙기고... 투정부리고.... 그래서 정말 미안해...] 소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딘지 모르게 슬픈 미소였다. [승아님은... 참으로 이상하신 분이옵니다. 정말.... 천계의 선녀가 내려오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보기엔... 니가 그래...]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밖에서 궁인이 아뢰는 소리가 들려왔다. [령님. 계시옵니까?] 소연이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 승아님도 계시군요. 폐하께서 모셔오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수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날?] [네. 그리고... 령님도......] 소연은 좀 의아한 듯 했지만 얼른 나갈 채비를 갖추고선 수빈의 뒤에 섰다. 수빈과 소연이 왕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우혁이 성훈의 앞에 서 있었다. [승아는... 이리로 와서 앉거라.] 성훈의 말에 수빈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입을 꾹 다물고는 성훈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왕실 한쪽엔 지훈이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빈은 뭔가 초조해지는 것을 느끼며 손톱을 깨물다가는 얼른 손을 내렸다. 기분이 이상하다. [풍사. 내 오래 생각을 해보았다.] 성훈이 입을 열었다. [이제 풍사도 부인을 맞아야 되지 않았느냐.] 움찔.... 움찔한 것은 우혁만이 아니었다. 수빈도 긴장을 해서는 성훈을 쳐다봤다. 무슨 말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혹시라도 저를 보내준다 할까봐 은근히 기대를 해보는 수빈이었다. [아닙니다, 주군. 주군께서도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으셨는데... 어찌 제가 혼례를 올릴 생각을 갖겠습니까.] [아니, 아니다. 넌 내게 있어 형과도 같은 존재이니... 나보다 먼저 혼례를 올리는 것이 당연한 의이다.] 우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성훈의 말만을 기다렸다. 우혁에게도 일말의 기대감이 일었다. 하지만 성훈의 말은 우혁에게도, 수빈이게도... 그리고 소연에게도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령을 너의 아내로 맞이하도록 하여라. 령은 서후 대신의 첫째 딸이니 너의 아내가 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혼례는 내달 4일 경으로 잡았으니 아무 걱정 말고 기다리거라. 내 모든 준비를 도맡아 해주마.]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이었다. 성훈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가슴 아픈 침묵....... 수빈은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우혁이 거절하기를.... 거절하고서..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 옆에 앉아있는 여자라고 말해주기를.... 그리 되지 않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간절히 원하고 원했다.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네, 주군. 주군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혁은 거절의 말은커녕, 오히려 감사드린다는 말까지 하고는 일어서 나가버렸다. 수빈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일어나서 우혁을 잡고 싶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도 없다. 거친 숨만 내쉴 뿐이었다. 옆에서.. 성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령. 내게 더 할 말이 있느냐?] [아........아닙니다.... 폐하...] [그럼 이만 나가보거라. 넌 아름다운 신부가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힘겨운 미소로 답한 소연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왕실 한쪽에서 한심하다는 듯 성훈을 쳐다보던 지훈이 얼른 달려와 쓰러지려는 소연을 부축했다. 어찌하려.... 폐하께선.... 이리도 저의 가슴을 밟으시는 겁니까... 어찌... 폐하가 아닌 다른 남자를 제게 주시는 겁니까... 그저 폐하의 곁에서 폐하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전 행복할진데... 어찌하여 절... 다른 이에게 보내시는 겁니까... 성훈의 앞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지만...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말을 소연은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하지만 소연의 절규는 소연의 가슴만을 아프게 치고는 다시 되돌아왔다. 지훈에게 부축되어 나가는 소연을 멀거니 쳐다보던 수빈은 천천히 지금 상황을 정리하며 숨을 골랐다. 꿈이라고 생각하자. 수빈이 속으로 말했다. 이 모든 걸 꿈이라고 생각하자. 우혁이도 꿈이고... 이 빌어먹을 왕비도 꿈이야. 내 친구 고성훈이 왕이 된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조금 현실적인 꿈이라고 생각해보자. 우혁이는... 꿈속의 인물일 뿐이야. 그러니까.... 우혁이 일로 가슴 아파할 필요 없어. 자기 최면을 걸어본다. 전혀 가슴 아파할 필요 없어. 그리고 난... 그냥 끝내주게 괜찮은 왕비가 되면 되는 거야. 꿈이니까... 역사에 길이 남을 왕비가 되는 것쯤.. 문제없을 거야. 그리고 최고의 왕비가 되었을 때... 이 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을 때... 재수 없는 꿈속의 고성훈에게 말해주는 거야. [고성훈... 난... 반드시 널 죽일 거야....] 마음속으로 곱씹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성훈은 조금 놀란 듯 했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 [들은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다행이구나. 승아... 넌 결코 날 죽일 수 없다. 그리고... 너 자신 역시 죽일 수 없을 게다. 이제 넌... 나의 것이니까.......] <18> [승아... 넌 결코 날 죽일 수 없다. 그리고... 너 자신 역시 죽일 수 없을 게다. 이제 넌... 나의 것이니까.......] 이제 난... 성훈이의 것이란 말이지.. 우혁이가.... 다른 여자를 갖게 되었으니... 내가 돌아갈 곳이 없다... 그거지...? 수빈은 가만 누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까 왕실에서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저도 모르게 싸늘한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지금 이 상황이 우습다. 우스워서..... 눈물이 난다. 하지만 주먹을 꽉 쥐고 눈물은 참은 수빈은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정말... 거지같아서 못 해먹겠네. 좋아, 고성훈. 니가 그렇게 나온다면.... 니 뜻대로 해주지. 너만 보고, 너만 바라고, 너만 따라다니겠어. 그리고 내가 너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날... 모든 걸 무너뜨려 줄 거야.] 차가운 미소..... 지금까지 수빈이 한 번도 지어보지 못한 차가운 미소가 수빈의 입가에 걸렸다. [그리고 넌 후회하게 되겠지. 날... 우혁이에게서 빼앗은 것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누구냐.] [저..... 령이옵니다, 승아님.] [.......들어와...] 소연이를 미워하지 말자. 소연이는 희생물일 뿐이야. 내가 궁에만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소연이는 왕과 행복하게 살았을 거야. 나 때문에... 소연이는 사랑을 잃고, 원치 않는 사람과 결혼해야돼. 그러니까... 미워하지 말자. 모두.. 나의 잘못이다. 소연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불공을 드리고 온 후, 많이 밝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슬픔에 잔뜩 찌들어 다시는 밝아질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승아님. 전.......] [니가 뭘?] 수빈이 말을 끊었다. [니가 뭐가 죄송해? 우혁이랑 결혼해서? 아니, 죄송할 거 없어.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지금 니 가슴도 찢어지게 아프면서.... 그렇게 자책하지 마. 바보처럼.... 미안해할 거 없어. 잘못한 건.. 처음부터 끝까지 나야.] 분명 많이 슬퍼할 거라 생각하고 찾아왔는데, 수빈의 표정을 여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슬픔이 모두 지워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슬픔에서 못 헤어 나오는 그런 표정은 아니었다. [아닙니다, 승아님이 잘못하셨다니요. 그런....] [그만... 이런 이야기 그만 하자. 세상에는.. 즐거운 일이 얼마나 많다구.. 이런 슬픈 얘기들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 아깝잖아. 그러니까.... 그만 하자.] 수빈이 미소를 지었다. 억지웃음은 아닌 듯 했지만, 이 상황에서 수빈의 미소가 왠지 어울리지 않아 소연은 수빈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성훈을 노려봤다. [무슨 말이냐.] 성훈은 다짜고짜 왕실에 뛰어 들어와 난데없이 외치는 지훈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훈은 조금도 성훈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약간 바랜 듯한 지훈의 갈색 머리가 흔들렸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지금 주군의 행동 말입니다. 이런 행동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행동이 뭐가 어떻다는 것이냐.] 지훈의 한쪽 눈이 씰룩거렸다. [주군은 지금.....] 살의에 타는 지훈의 눈.... 지훈이 저를 죽일 리 없다는 건 알지만 처음으로 보는 지훈의 차가운 눈빛에 움찔하는 성훈이었다. [세 사람의 인생을 망치려 하시는 겁니다.] [여자를 바치는 것은 선왕 전부터 행해져오던 일이다. 내가 풍사가 좀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았다고 해서 네가 그렇게 길길이 날뛸 것은 없잖느냐.] [좀 사랑하는 여자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주군께서 눈이 머시지 않았다면 풍사와 승아님이 사랑함이 조금 사랑함이라고 말씀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운사.. 네가 흥분한 것 같구나.] [아니요. 전 지극히 정상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마음이 착 가라앉는 기분입니다.] [대체 나보고 어찌하란 말이냐.] [왕비 간택을 취소시키십시오.] 성훈이 지훈을 노려봤다. [아니,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난 모두를 적으로 돌리더라도 승아를 나의 손에서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 뭔가 더 말하려던 지훈이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태라면 무슨 말을 해도 성훈의 귀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성훈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자가 우혁이라면 그건 더 말할 것도 없다. 우혁이 절대 성훈에게 반기를 들지 않으리란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멍청한 자식... 지훈은 속으로 욕을 하며 성훈에게서 몸을 돌렸다. 예를 표하는 인사 따윈 없었다. 문을 쾅 닫고 나오는 지훈의 행동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아마도 우혁의 칼에 목이 날아갔을 터였다. 걸음을 빨리한 지훈은 우혁이 있을 곳으로 찾아 갔다. 우혁이 있을 만한 곳.... 딱 한 군데... 수빈이 있는 곳..... 역시나 우혁은 수빈의 방 근처 보이지 않는 곳에 서서 수빈의 방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훈은 다짜고짜 우혁의 팔을 붙들어 우혁을 돌려세웠다. 우혁의 회청색 눈동자가 천천히 지훈에게 향했다. 우혁의 눈 가득히 들어있는 쓰린 슬픔에 지훈은 저도 모르게 울컥해 주먹으로 우혁의 가슴을 세게 쳤다. [도망가.] [......그게.... 무슨 말이냐..] 목소리에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죽은 사람 같은 목소리..... [수빈이 잡아서 도망가라구.] [........이름을... 함부로 올리......] [짜증나니까 헛소리 좀 그만하고!!!!] 지훈이 우혁의 말을 끊으며 외쳤다. [너도 알겠지만... 현수빈.. 너만 보는 애야. 니가 손 내밀면 바로 그 손 붙잡을 애라구. 잡고... 도망가. 어디로든..... 넌 어디 가서든 잘 살 수 있잖아. 정 안 되면 백선국에라도 망명을 가던지... 어떤 나라에서든 다 널 원하니까.... 여기 못지 않게 잘 살 수 있잖아!!!! 빌어먹게 슬픈 표정으로 살지 말고.. 도망가라구!!!] 지훈은 가슴이 아팠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도 아닌데 둘의 사랑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와 우혁을 잡고 흔들며 절규하듯 외쳤다. 오히려 당사자인 우혁은 침착한 표정으로 입을 꼭 다물고는 지훈을 지켜봤다. [제발... 도망가란 말이다...] [운사.... 많이 흥분했군...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난......] [지금.. 쉴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 [..............난.... 주군의 명령에 따른다. 승아님은.....................] 우혁이 고개를 돌려 수빈의 방을 쳐다봤다. [행복하실 것이다. 운사... 날 걱정해준 것은 고맙지만... 난... 주군을 배신하는 일.. 절대 없을 것이다.] [난 정말...... 널 이해할 수 없다, 풍.사.] 딱딱 끊어 우혁을 질책한 지훈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 걸음을 옮겼다. 내달 4일 경이라는 것은 그 때로부터 일주일밖에 안 남은 시간이었다. 일주일동안 우혁은 변함없이 수빈을 지켰지만 수빈의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했고, 수빈은 우혁의 향으로 우혁이 어딘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우혁을 만나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소연과는 오히려 사이가 좋아져 몇 분이 멀다하고 만나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소연의 집안에선 우혁과 사돈을 맺는 것이 왕과 결혼을 하는 것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었기에 잔치 분위기에서 혼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궁녀들은 모두 질투 어린 시선을 소연에게 보냈고, 고소하단 눈빛을 수빈에게 보냈다. 하지만 수빈에게 말을 잘못하면 우혁의 칼이 목을 벨 것이란 걸 알기에 누구도 수빈에게 안 좋은 말을 하진 않았다. 지훈은 여전히 화가 난 듯 했지만, 처음보단 많이 진정된 모양으로 가끔 수빈을 찾아와 곁에 서서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누다가는 돌아갔다. 성훈은 늘 밤이면 수빈을 찾았지만, 수빈과 성훈 사이에선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육체적 접촉이 있으면 한 마디 쯤 할 법도 하지만 수빈은 입을 꼭 다물고는 평소 때의 앙칼진 거부의 말조차 하지 않아 성훈의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 그리고 혼례 날이 돌아왔다. 검은 옷을 벗어던지고, 푸른빛이 나는 환한 옷을 입은 우혁은 미소 띤 얼굴로 축하하러 온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성훈의 옆에 서 있던 수빈은 우혁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며 가슴 쓰린 것을 달랠 길이 없었지만 억지로 꾹꾹 누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곧 식이 시작되고, 아름답게 꾸민 소연이 나왔다. 절세의 미인이라고.... 한껏 치장한 소연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워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이 입을 넋을 잃고는 소연의 모습을 주시했다. 그리곤 다들 입을 모아 선남선녀 부부라며 칭찬을 해댄다. 그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수빈은 가슴을 난도질당하는 고통을 느끼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기로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혁의 맞은편에서 우혁에게 맞절을 하는 소연이 너무도 원망스럽다. 소연이 있는 자리에 서고 싶다.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짧은 혼례와 긴 축하가 끝난 후, 우혁과 소연이 함께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수빈은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서서 혼례를 올리던 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19>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식장에서는 미소를 띠고 있던 우혁도 집으로 돌아오자 싸늘하게 굳어서는 침대에 앉아 한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풍사님...] 침묵을 깬 것은 소연이었다. 우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좀 싸늘해진 밤바람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둘의 차게 식혀줬다. [그래, 무슨 일이냐.] [.....소녀를.... 승아님이라 생각하십시오.] 우혁의 미간이 보기 좋게 좁혀졌다. 진한 눈썹이 움직이며 그림 같은 굴곡을 만들었다. [제가 비록 미천한 몸이지만...... 소녀를... 승아님이라 생각하고 안으시면 소녀.. 성심성의껏 풍사님의 시중을 들겠습니다.] 우혁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우혁의 커다란 손이 소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우혁의 손길이 느껴지자, 소연은 입을 꼭 다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에서.... 예전 수빈이 기억을 잃은 날의 모습이 떠올라 우혁은 가슴이 아파왔다. 혼례를 올릴 때, 눈을 안 마주치려 노력했지만 문득문득 눈으로 들어오는 수빈의 아픈 모습에 덩달아 아파져 억지웃음마저 지워질 뻔한 우혁이었다. [내가.. 그리하여도 괜찮겠느냐?] [네, 풍사님. 이제 풍사님의 처이오니.... 소녀는.. 언제는 풍사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사옵니다.] [그러하더냐...] 우혁이 천천히 허리를 굽혀 소연의 입술이 입을 맞췄다. 소연은 몸을 움찔했지만 곧 긴장을 풀고 우혁을 받아들였다. 우혁이 손이 천천히 소연의 목덜미를 쓸었다. 오랜 검술 연습으로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힌 우혁의 손바닥은 곱게곱게 자란 성훈의 손길과는 다르게 남자답고, 조금은 거칠었다. 하지만 그 다른 손길에서도 느껴지는 것은 오직 성훈뿐이었다. 그 때, 우혁의 입술이 떨어지면서 손길도 멈추었다. 우혁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낙화하는 듯한 미소.... [령아. 네 마음은 고마우나.... 지금은.. 지금은 누구도 안고 싶지 않구나.] [........아닙니다, 풍사님....] [네게도 원치 않던 결혼이었을 테니....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 소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난... 바람을 좀 쐬고 와야겠구나. 먼저 잠자리에 들거라.] 나직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한 우혁은 풀러놓았던 칼을 집어 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거지같아..] 수빈이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거지같아서.... 막.. 짜증이 밀려와.] [................] [내가... 말 안 한 게 있는데... 말해줄까? 이 말 들으면.. 넌 날 미쳤다고 할지도 몰라.] [...............]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현실이라고 믿고 싶었거든. 우혁이도.. 너도... 전부 현실이라고 믿고 싶어서 말 안 했는데... 지금은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말 할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묵묵히 수빈의 칭얼거림만 듣던 지훈이 입을 열었다. [난..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야.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라구. 한 마디로 말해서... 넌 꿈속의 인물이야. 우혁이도, 소연이도.. 전부 꿈속의 인물인 거지. 여기서.. 꿈속의 인물이 아닌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어. 그게 바로.... 고성훈이야. 고.성.훈..] [.................] 지훈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슬픔에 못 이겨 수빈이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거라 생각하고 묵묵히 수빈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말하는 수빈은 슬픔에 못 이겨 헛소리하는 사람치고는 너무 냉정하고, 차분했다. [고성훈은 현실에서 나와 친구야. 그것도 둘도 없는 소꿉친구.... 그 친구가 왕이라니.. 그리고 날 좋아한다니.. 그게 말이 돼? 절대 그런 일은 없다구. 물론... 너와 우혁이가 그저 꿈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정말 너무 화가 나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지금 이건... 정말 꿈이야. 꿈!!!] 수빈은 신경질적으로 하얀색의 옷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기억상실증이라구? 아니, 절대 아냐. 생각해봐. 만약 이게 현실이고... 성훈이와 지냈던 20세기의 일들이 꿈이라면.... 기억상실 걸린 내가 꿈만을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할 리 없잖아. 아무리 현실적인 꿈이라도... 깨고 나면 희미하게 되는 법이야. 어떻게 내가 이런 꿈을 꾸는지 모르겠어. 만약 꿈이 아니라면 내가 과거로 떨어진 거겠지. 하지만... 과거로 떨어졌다면...? 전에 있었던 이우혁의 연인인 현수빈이란 인물은..? 그 인물의 인격은 어떻게 된 거지? 이건 절대 꿈이야!!!! 너무 현실적이긴 하지만.... 깨고 나면 희미하게 잊혀져갈 꿈...] [승아님...]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내가 슬픔에 겨워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해? 아니. 난 지극히 정상이야.] 수빈의 갈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다가 곧 이성을 되찾고는 차분하게 멈췄다. 수빈은 전에 지훈이 사준 하얀 단도를 만지작거렸다. 그 중앙에 박힌 흑진주를 사랑하는 이라도 만지는 양, 천천히 쓰다듬는 수빈을 본 지훈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인사를 하고는 방에서 나왔다. [승아님.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소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어쩌면 수빈이 화가 나 자신을 내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는지도 몰랐다. [응, 너도 잘 잤어? ]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는 수빈의 마음 씀씀이에 소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승아님.. 어젠.......] [아니, 말하지 마..] 수빈이 말을 끊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나에게 말하지 마. 만약... 너와 우혁이가 동침을 했다면... 난 가슴이 아플 거고.... 동침을 하지 않았다면... 난 헛된 기대감에 부풀어서... 우혁이가 날 쳐다봐주지 않음에 괴로워할 거야.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소연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의 수빈은 예전과는 달리 슬픔을 얼굴 가득 담고 있진 않았지만, 오히려 지금의 성숙하고 차분한 모습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더 아프게 두드리고 있었다. [승아님... 정말..... 전.....] [많이... 힘들지...?] [아아.....] 죄송하다고 말하려던 소연은 말을 멈추고 수빈을 올려다봤다. 이분은... 선녀다... 단 한 생각만이 소연의 머리를 차지했다. [나도.. 니 마음 알아. 하지만.....] 수빈의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행복하기만 바라는 것도.. 어리석은 짓일 거야. 이 세상에 사랑이 이루어지는 경우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반 반 씩이야.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같은 아픔을 지니고 살겠지. 난... 바보처럼 나만 슬프고, 나만 괴로울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참을 수 있는 고통일 거야. 신은 우리에게.. 극복할 수 있는 시련만을 주시니까......] 승아님... 당신이 왕비가 되신다면.... 이 나라는 역사에 빛나게 될 것이옵니다. 당신이.... 마음을 먹고 나라의 치정에 참여하신다면... 정말 이 나라는... 역사에 길이 빛나게 될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모두들.... 승아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겠지요. 전... 지금도 승아님과 같은 시대에 삶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아.. 그런데......] 수빈이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수빈의 말을 중지시켰다. [누구야?] [풍사이옵니다.] [..........들어와라...] 수빈이 조금 어색한 명령조로 말했다. 문이 열리고...... 우혁이 들어섰다. 다시 검은색의 옷으로 온몸을 휘감은 우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수빈에게 인사했다. [풍사님.] [아... 령도 있었구나.] 우혁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수빈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배를 감싸 쥐었다. 승아님, 승아님.. 딱딱하게 부르면서... 소연에게는 너무나 다정한 말투..... 얼마 전까지는 수빈의 것이었던 그 따뜻한 말투로 소연을 대한다고 생각을 하자, 갑자기 명치끝이 심하게 아파왔다. [으흑........] 참고 있던 흐느낌이 입 밖으로 새어나갔다. 괴롭다. [아.... 승아님, 어디 편찮으십니까.] 우혁이 다급히 수빈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뭐라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입을 벌리면 대답이 나오기 전에 오열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수빈은 입을 꼭 다물고 배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승아님..] 소연이 걱정스러운 듯 수빈을 불렀다. [령아. 가서 의원을 불러 오거라.] [네, 풍사님.] 소연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수빈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빈아...라고 불러주던 그 다정한 목소리가 이제는 령..이란 이름을 담는다. 질투하지 않겠다, 괴로워하지 않겠다 결심했건만 우혁이 눈앞에서 다른 여자에게 따뜻하게 대함은 생각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무기가 되어 수빈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으흑.....] 다시 한 번 신음이 새었다. 수빈은 배에 대고 있던 한 손을 떼어 입을 막았다. 더 이상 흐느낌이 새어나가다가는 우혁이 흐느낌의 이유를 알아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자존심 따위는 중요하지 않지만, 우혁이 이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는 건 싫었다. 다른 여자와 함께이더라도... 우혁이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수빈이었다. 우혁이 걱정스레 수빈의 팔을 잡았다. [승아님. 괜찮으십니까?] 빈아.. 괜찮아...? 그래.. 옛날 같으면... 이렇게 말해줬겠지. 하지만.. 이젠... 령아.. 괜찮은 것이냐... 그런.. 말만 하겠지? 앞으로 다시는... 빈아.. 괜찮아...?라는 말... 들을 수 없겠지..? 그런 따뜻하고 다정했던 말.. 들을 수 없겠지? 타악!!!!!!!! 수빈은 거세게 우혁의 손을 쳐냈다. 우혁이 조금 놀란 눈으로 수빈을 쳐다봤다. [풍사.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어딜 감히 나의 몸에 손댄단 말이냐. 앞으론 그대의 신분에 맞는 행동만 하길 바란다. 폐하께서 날 찾으시더냐?] 우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까지도 딱딱하긴 했지만, 지금은.. 마치 돌이 되어버린 것처럼 딱딱하고, 차갑게 굳어버렸다. 숨조차 쉴 수 없는 돌덩이처럼 가만히 수빈을 응시하던 우혁은 수빈의 싸늘한 말을 들으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찌하여 날 그렇게 노려보는 게냐?] [아... 아... 죄... 죄송합니다, 승아님..] [난 이만 폐하께 가보겠으니... 령과 좋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여라. 둘 다... 괜히 내게 신경을 쓰느라 달디 단 신혼의 한 때를 보내지 못하는 것 같은데... 앞으로 괜한 신경 쓸 필요 없다.] [그.. 그런 게.....] 우혁이 다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수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풍사. 난.. 사실.. 풍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 내 앞에 얼굴 드러내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그리울 거야. 미친 것처럼 보고 싶겠지. 하지만... 하지만...... 다른 여자를 담고 있는 널 보느니...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아. 나만을 사랑했던.. 나에게만 다정했던... 그 때의 너의 모습을 내 마음에 담고... 그것만 꺼내어서 볼래.... 차게 굳어버린 우혁을 놔두고 수빈을 휙 몸을 돌렸다. 문 앞엔 의원과 소연이 입을 꼭 다물고 둘을 쳐다보다가는 수빈이 나가려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소연이 수빈의 뒤를 따르려 하자 수빈이 말했다. [날 따라올 것 없다. 이 환한 대낮에 대체 누가 날 건드리겠느냐. 걱정 말고, 그대의 낭군님과 좋은 때 보내거라.] 수빈의 눈을 차가웠지만, 수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느낄 수가 있어 소연은 입을 꼭 다물고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행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수빈을 붙잡고 울어버릴 것 같기에....... <20> 일주일 안에 한문을 전부 익히겠다. 수빈이 그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알았을 때, 대신들의 놀라움이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빈이 국사를 읽으며, 타고난 영특함으로 이러저러한 자기의 생각을 얘기할 때에도 대신들은 수빈의 능력을 놀라워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수빈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던 그들은 수빈이 거리의 여자라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고, 속으론 여전히 수빈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혁과 지훈이 눈을 번뜩이고 있는 한은 수빈을 몰아낼 수 없기에 조용히 수빈을 추대하는 척 했다. 수빈 역시 대신들의 그런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겉으론 대신들을 높이고, 마치 자기가 왕비가 다 된 양 행동하긴 했지만 속으론 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수빈은 왕비가 되어 권력을 잡게 된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성훈을 죽이는 것.... 그 한 가지 목표가 수빈을 노력하게 만들었다. 수빈은 다른 사람들 앞에선 성훈에게 깍듯이 예우를 갖추었지만 둘이 있을 땐 처음과 다르지 않은 태도로 성훈을 대했다. [왜 불렀어?] [줄게 있어서 불렀다, 승아.] [필요 없어.] 수빈은 차갑게 대꾸하고 돌아섰다. [승아. 나가지 말고, 여기 앉거라.] 성훈이 단호하게 명령했다. 수빈이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니가 명령하면.. 내가 듣는다. 정말 웃기는 정의네, 웃기는 정의야. 그런 껍데기 같은 권력이 얼마나 갈 거라고 생각해?] [...............] 성훈은 물끄러미 수빈을 쳐다봤다. 그저 사랑하는 것뿐인데 늘 적의를 품고 대하는 수빈을 보노라면 화가 난다는 생각보다는 가슴이 아파진다. 슬퍼 보이는 성훈의 눈빛에 수빈은 말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긴 했지만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건........ 누가 준 반지인가?] 성훈이 탁자 위에 다소곳이 올려놓은 수빈의 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수빈은 무슨 말인가 싶어 손을 내려봤다가 곧 성훈의 질문을 깨달았다. 어느 맑은 날.. 기분이 몹시 안 좋은 상태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쇼윈도를 통해 보이는 반지가 너무 예뻐서 충동적으로 사버린 파란 보석이 박힌 금반지... 늘 끼고 다녔기에 이제는 한 몸이 되어버린 듯 반지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수빈을 성훈이 일깨워준 것이었다. [그냥..... 내가 산거야.] [아... 아름답구나. 그것은 어느 나라의 기술이더냐?] 현대적인 감각을 살려 만든 반지가 성훈의 눈엔 상당히 아름답게 보인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계를 가지고 정확하게 깎은 보석은 이 시대의 보석과는 달리 반듯하게 깎여 비싼 보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몇 배는 더 영롱한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쎄.... 잘 모르겠어.] 수빈이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물끄러미 수빈의 반지를 응시하던 성훈이 옷섶에서 뭔가를 꺼내어 수빈의 앞에 놓았다. 푸른색의 옥 반지... 둥글게 깎여진 옥 반지는 특유의 영롱한 빛을 발하며 어서 주인이 손가락에 끼워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네게 주는 선물이다.] [이유 없는 선물 따윈 안 받아. 나에게 이걸 주는 이유가 뭔데?] [........그건...........] 성훈은 말문이 막힌 듯 수빈을 쳐다봤지만, 수빈은 이유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손에 대지도 않겠다는 듯이 도도한 표정으로 성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혼례를 올리게 될 테니.. 예물로.....] [그럼 벌써부터 주지 말고, 혼례 올릴 때 주면되겠네. 그리고 난 이 반지 외에 다른 반지는 끼고 싶지 않아.] [아......] 성훈은 답답함을 느끼며 수빈의 눈을 쳐다봤다. 수빈의 눈동자는 성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수빈의 눈에 비추어진 것은 성훈이 아니었다. 어째서 이 자리에 우혁이 없는데도 마치 우혁이 있는 양, 그 모습이 비추어지는 것인지...... [내게 뭐 할 말 있어?] [그래, 알겠다. 승아. 돌아가거라.] 성훈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손을 저었다. 수빈은 변함없이 싸늘한 표정으로 성훈을 한 번 쳐다보고는 깨끗하게 몸을 돌려 왕실을 나왔다. 우혁의 방에 들어가다가 침대에 앉아 머리를 거머쥐고 있는 우혁을 본 지훈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긴장을 풀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혁의 온 몸이 고통을 내뱉는 것만 같다. [누구냐..] [지훈이다.] [..........그래.........] 우혁이 길게 끌며 대답했다. 목소리에 슬픔이 묻어났다. [왜 이렇게 괴로워 보이냐?]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우혁의 모습이 지금까지보다 훨씬 힘들어 보여 지훈은 인상을 찌푸리며 우혁의 옆에 앉았다. [난.........] 우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혁의 진한 고동빛 머리카락이 희미한 등잔불에 흔들리고 있었다. 밖이 아주 어두워진 것은 아니지만 커튼을 쳐놓아 어두운 방안을 비춰주는 것은 등잔의 희미한 불줄기 밖에 없었다. 그 희미한 빛이 우혁의 삶을 겨우겨우 지탱해주는 무언가 같아 지훈은 자꾸 신경이 등잔불로 쏠렸다. 등잔불이 꺼지면 우혁의 삶도 꺼진다..는 얼토당치도 않은 생각이 자꾸 지훈을 건드렸다. [난............] 우혁의 목소리도 등잔불만큼이나 희미했다. [정말... 나쁜 놈이다....] [................] [내가.... 내가 수빈이를.... 마치 모르는 사람 대하듯 대한 것은.... 경칭을 써서 높인 것은..... 주군의 명령도 있었지만.... 나의 이런 태도로 하여금... 수빈이가 날 빨리 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이제껏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혁이 고개를 들어 흔들리는 등잔불을 응시했다. 바람이 들어오는 곳도 없었지만 불은 꺼질 듯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불빛에 따라 우혁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오늘... 수빈이가.... 내게..... 풍사라 부르며.... 차갑게 말을 하자.... 위태롭게 걸려있던 내 가슴이... 갈가리 찢기더라. 조각조각 산산이 부서져 땅에 떨어지더라. 마치 남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신하를 대하는 듯한 태도로 날 대하는 수빈이의 태도가... 지금까지 그 어떤 것들보다도 더 아프게 다가오더라.] [.............................] [......괴로웠겠지... 수빈이도.... 내가 자기를 그렇게 높일 때마다.... 내가 겪었던 그 고통을 그대로 받으며... 꾹 참았던 거겠지? 눈물도 많으면서... 내게 우는 모습 보이지 않으려 참고, 또 참았던 거겠지?] [..................] [난 단 한 번 수빈이가 날 차갑게 대했을 뿐인데도... 이렇게 가슴이 찢기는데...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수빈이는... 수빈이는... 지금까지 얼마나 괴로웠을까?] [...........] [난.. 탓하고 있었다. 내 말을 안 듣고 궁에 들어와 주군의 눈에 띄어버린 수빈이를.... 수빈이를 딱딱하게 대함은... 그것을 탓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내 행동이.. 이렇게까지 가슴 아플 줄은... 난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 했다. 수빈이는 견디는데.... 더 많이 괴로운 수빈이는 견디는데... 난 단 한 번의 차가움 가지고 이렇게 죽는 소릴 하다니... 난 정말.. 나약하고... 나쁜 놈이다...] [...............] 지훈은 말없이 우혁을 쳐다봤다. 우혁의 날카로운 콧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빈이를 괴롭게 했을.. 나의 혀를.. 잘라내고 싶다. 앞으로.. 수빈이를 괴롭게 할 나의 혀를.. 도려내어버리고 싶다. 내가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수빈이를 높여야하는데... 그럼.... 그럼 수빈이는.... 또 다시 괴로움을 견디며... 슬프지 않은 척.. 행동해야겠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 혀를 잘라 말을 못 하게 됨이 나은데.....] [수빈이는... 바보가 아니니까.....] 지훈이 입을 열었다. [너의 사정 충분히 이해할 거다. 네가 받는 고통... 수빈이는 이해할 거다. 그러니까.... 이런 일로 고민해서 몸 버리지 말고... 좀 더 건강한 모습으로 수빈이를 대해라. 그게.. 수빈이를 위하는 길이다. 너희 둘의 사랑은.. 너무 희생적이라서.... 니가 건강한 모습만으로도.. 수빈이는 행복할 거야. 니가... 그러는 것처럼........] [.......................] 우혁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지훈이 일어섰다. [어떻게 하고 있나 보려고 잠시 들렀는데... 역시나 죽을상을 하고 있었군. 난 이만 가봐야겠다.] 지훈이 나가고 방에 덩그마니 혼자 남겨진 우혁은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며 침대에 누웠다. 이제는 소연과 함께 사용하는 침대.... 옆에 누운 것이 수빈이 아니면 잠이 오지 않는다. 조만간 침대를 하나 더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우혁은 눈을 감았다.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21> 늦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을을 장식하던 단풍들도 이제의 하나, 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수빈은 물끄러미 연못을 응시했다. 저주 받은 연못... 성훈을 처음으로 만난... 그날의 일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진다. 성훈도 옆에서 추억을 되새기는지 가만히 연못을 응시하고 있었다. 연못에 나와 바람을 쐬면서 먹으려고 싸온 몇 몇 가지 음식들이 식어가고 있었지만, 성훈과 수빈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곳은 나의 추억의 장소다.] 이윽고 성훈이 입을 열었다. 꿈에서도 보기 싫은 연못이지만 이 연못이 아름답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왕이 되기 전.. 풍사와 운사..나.. 셋이서 자주 왔던 곳이지. 이곳에 앉아 토론도 하고, 검술 연습도 하며.. 이것저것 생각해야할 것들을 다 버리고, 우리만의 놀이를 즐겼던 곳이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은 늘 행복했다.] [그리고.. 넌 널 행복하게 해준 이의 여자를 빼앗았고?] 가시 돋친 수빈의 말에 성훈이 씁쓸하게 웃었다. 성훈은 뭔가 더 이야기를 했지만, 성훈의 이야기를 귓전으로 흘리며 수빈은 주위를 한 번 돌아봤다. 우혁이 보이진 않지만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우혁만의 향이 있다. 그리고 그 향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날 구하러 와주겠지... 수빈은 옆에 있는 시든 풀을 잡아 뜯었다. 연못이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지막이야... 마지막으로 널 느껴보고 싶어. 정말.. 마지막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 위엔 져가는 연꽃과 푸른 잎 몇 개가 떠 있었다. 수빈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성훈이 [앗!!]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식간에 차가운 물이 수빈을 휘감았다. 수영을 아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움직이면 바로 연못을 빠져나갈 수 있지만, 팔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우혁이 구하러 오지 않아도 일부러 팔을 휘저어 살아나는 일 따윈 안 할 것이다.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수빈은 온몸에 힘을 빼고 물로 잠겨들었다. 코로, 입으로 물이 들어왔다. 폐에 물이 차는 것이 느껴진다. 괴로워.. 그 때, 누군가 수빈의 팔을 잡아당겼다. 물 속에서도 느껴지는 희미한 우혁의 향기.... 혁아... 눈을 떠보니 희미하게 누군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검은 옷.... 우혁일 것이다. 공기처럼 지켜주겠다던 우혁일 것이다. [혁아..] 우혁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고 싶었지만 입 안으로 물만 벌컥벌컥 들어왔다. 우혁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급히 수빈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끌어당겨 수빈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입을 통해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차가운 물 속에서 우혁의 손만 따뜻하다. 수빈을 품에 끌어안은 우혁은 수면을 향해 헤엄쳤다. 따뜻해... 수빈은 그냥 이대로 죽고 싶었다. 그리도 원하던 우혁의 품에서 그렇게 죽는다면 한 치의 후회도 없을 것만 같았다. 우혁의 단단한 팔이 수빈을 꽉 끌어안고 있는 지금, 수빈은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었다. 단 하나 있다면... 시간이 이대로 멈춰주길 바라는 것뿐... 하지만 매정한 시간은 그냥 흘러가버리고, 우혁과 수빈은 물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불어왔지만, 우혁의 품에 안겨있는 수빈은 더없는 따뜻함을 느꼈다. 어느 것도 침범할 수 없게 하려는 듯 수빈을 품에 꼭 그러안고 있던 우혁은 땅에 도착하자 수빈을 아래에 내려놓았다. 아쉬워서 우혁을 붙잡고 싶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우혁에게서 떨어지자 싸늘한 오한이 몸을 감싸 수빈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수빈이 떠는 것이 느껴졌는지 우혁이 제 옷을 벗어 물을 꽉 짜 수빈의 위에 덮었다. 비록 우혁의 옷도 젖었고, 차가웠지만 수빈은 따뜻함을 느꼈다. 성훈이 옆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뭐라뭐라 떠들고 있었지만 수빈의 귀에는 단 한 사람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빈아... 한 번 더 이런 일 있으면... 난... 날 용서할 수 없을 거야...] 귓가에 느껴지는 우혁의 숨결... 한 번쯤은 울어도 되려니 싶었다. 어차피 온통 물에 젖어있으니 소리만 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동안 참고 있던 눈물을 조금씩 흘려보내는데 또 다시 우혁의 나직한 목소리가 수빈의 청각을 자극했다. [울지 마.. 내가 있잖아... 울지 마...] 어떻게... 울지 말라는 것인가.. 눈물이 날 정도로 따뜻한 목소리로... 이렇게 가슴을 때리면서... 어떻게 울지 말라 하는 것인가. 이제는 이 따뜻한 목소리, 이 따뜻한 품.. 느끼지 못하리라는 거...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다시는 기대하지 말아야한다는 거.. 잘 알고 있는데... 어떻게 울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곁에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입 맞추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데..... 흐느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멈추며 수빈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볼에 나는 따뜻한 느낌... 아마도 성훈일 것이다. 우혁은 허리를 굽혀 괜찮을 거라고 말하곤,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성훈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젠 늘 이런 일이 생길 게 분명하다. 우혁의 품이 아닌 성훈의 품에, 우혁의 목소리가 아닌 성훈의 목소리를.... 아마 죽을 때까지 이런 기분은 계속될 것이다. 아마도....... 따뜻한 이불을 덮고 나니, 조금 전의 일이 꿈 같이 느껴졌다. [어찌하여... 죽으려 한 게냐.... 내가... 죽기보다 더 싫었던 것이냐...] 성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훈은 떨고 있었다. 그 애틋한 목소리에 수빈은 가슴이 아파왔다. [승아...] 성훈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귓속으로 들어온다. 원래.... 이렇게 따뜻했던가...? 미처 몰랐던 느낌.... 성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리하여도.... 난 너를 놓아줄 수 없는 것을.... 널 이리도 사랑하는 것을.....] 성훈의 목소리가 아프게 들려온다. 왕이기에.... 표현하고 싶어도 제대로 표현조차 못하는 감정들... 그 감정의 씨앗들이 한데 뭉쳐 성훈의 눈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지금까지 참아온 성훈의 눈물샘을 아프게 자극했다. 성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눈물이 수빈의 볼에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성훈이 울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 아픔이 조금씩 수빈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미안해... 성훈아... 성훈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누구도 아파지는 것은 싫었는데 결국.... 모두가 아파하는 것 같다. [승아.. 편히 쉬거라..] 성훈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수빈은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까지 뒤집어썼다. [성훈아. 미안해. 하지만 난.... 널 사랑할 수 없어.] <22> [주군 앞에서 자살을 하려 하시다니요!!!] 지훈이 툴툴대며 초조한 듯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수빈의 행동이 꽤나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지훈이 걸을 때마다 길게 늘어진 청빛 옷자락이 펄럭댔다. [가만 좀 서 있어. 정신 사나워.] 수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지훈이 걸음을 뚝 멈추고서는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수빈을 쳐다봤다. [알겠어, 알겠어!!!! 이번이 마지막이었다구!! 정말 마지막이었어. 다시는 이런 짓 안 해. 그냥.. 그냥... 우혁이 품을 좀 느껴보고 싶었을 뿐이야. 너무... 어이없게 왕비로 간택 되어서... 우혁이 품을 느낄 틈도 없었잖아. 이게 마지막이야. 왕비가 될게. 너랑 우혁이가 그리도 원하는... 그 잘난 왕비가 되면 되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해!!!! 나도.. 이러는 게 싫어.] 수빈이 짜증난다는 듯 젓가락으로 음식을 휘저었다. 예쁘게 올려졌던 음식들이 무자비한 폭군 같은 젓가락에 의해 지저분하게 흐트러졌지만 지훈은 그것에 대해선 뭐라 하지 않았다. [이제... 이제 그냥 나 혼자 아파하고 끝낼게. 누구도 아파지는 거 싫어. 이런 고통... 혼자서 끝낼래.] [승아님 혼자가 아니라는 것 알지 않습니까.] 지훈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의 말엔 책망과 안타까움이 담겨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가서 전해. 나 현수빈.. 모든 아픔과 고통 혼자서 짊어질 테니까.... 우혁이는... 우혁이는 제발.. 부인이랑 행복해지라고... 행복한 모습 보면.. 나도 기쁠 테니까.... 제발 행복해지라고 전해!!] [승아님께서 직접 전하십시오.] 지훈은 조금 쌀쌀맞게 말했지만 수빈은 느끼지 못한 듯 젓가락만 움직이고 있었다. 전할 수 없다는 거 알면서...... 왜 그렇게 잔인한 걸 시키는 거야. 나....... 나......... 우혁이 얼굴 보면... 아무 말도 못하고 우혁이 품에 안겨... 눈물만 흘릴 게 뻔하단 거 잘 알면서..... 왜 그런 잔인한 걸 하라는 거야. 수빈이 슬픈 현실에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수빈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조금 여위긴 했지만 그것이 수빈의 아름다움에 흠이 되지는 않았다. 긴 속눈썹이 슬프게 흔들렸다. 왕비.... 수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간절히 우혁을 원하는 수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으로만 끝내야했다. 괜한 동정 때문에 우혁과 수빈을 자꾸 이어주려 하면... 우혁과 수빈은 오히려 더 힘들어지게 된다. 적휘국이 건립된 이후, 출생도 모르는 여자를 왕비로 맞이하는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만큼 수빈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은 수빈을 다시는 재기 못하도록 할 만큼 따가운 것이 될지도 모른다. 수빈의 작은 행동조차도 그들에겐 비난거리가 될 것이다. 그런 수빈이 우혁과 비밀리에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수빈은 더욱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게 될 것이다. 수빈과 우혁의 친구로서... 수빈이 뛰어난 여왕이 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리하여 자기를 비난하는 대신들을 언젠가는 깔아뭉개주기를.. 지훈은 간절히 바랐다. 타악!!!!!!!!!! 예상치 못한 소음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수빈의 손에 들려있던 나무젓가락이 저 멀리 벽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힘없이 흩어진 두 개의 젓가락을 보며 수빈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젓가락.. 나 같아..] [승아님...] [정말.... 비참한 모습이 꼭 나 같아서.... 짜증나.. 오늘은 정말로.. 짜증나는 날이야..] 온 몸에서 힘을 쭉 빼고 일어나 비틀거리며 침대에 가 눕는 수빈을 본 지훈은 씁쓸한 심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방문 앞엔 우혁이 서 있었다. 아직도 물이 떨어지는 옷을 입고, 젖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넘기며 지훈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수빈을 업고 와서 방에 눕혀놓고는 성훈이 수빈을 살피고 나가고, 수빈이 일어나 저녁상을 받을 때까지 저 옷 젖은 건 살필 생각도 안 한 채 줄곧 이곳에 서서 수빈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바람이 찰 텐데도 우혁은 자신의 몸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행동한다. [승아님은....?] 지훈이 나오자마자 우혁이 달려들 듯 물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니가 들어가 보지.] 차가운 지훈의 말에 우혁이 미간을 좁혔다. [정말 답답하군, 그래.] [난...........] 평소엔 청산유수처럼 말도 잘하면서 수빈의 이야기가 나오면 할 말을 못 찾아 머뭇거린다. [아무렇지도 않으셔. 감기 기운도 없으시고.... 식사도 잘 하셔. 카랑카랑 성질내시는 것도 똑같으시고... 그러니까 이제 가서 좀 쉬어. 옷도 갈아입고... 니가 병들게 생겼다.] [....................] 우혁은 말없이 자리에 서 있었다. 절대 떠나지 않겠다는 듯한 우혁의 모습에 지훈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분노.... 아마도 성훈을 향한 것이리라. [너도 좀 작작 해라!!! 둘 다 정말.... 내가 여기 지키고 있을게. 너 올 때까지 꼼짝 않고 서서 있을 테니까... 가서 옷 갈아입고, 몸 좀 말리고... 좀 자고서 와!!!! 눈에 핏발이 섰어!!!!] [........그럼........ 부탁한다....] 부탁한다고 말했으면서도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가 않는지 우혁은 자꾸 머뭇거렸다. 아이를 물가에 두고 가는 부모처럼 불안해 보이는 우혁의 모습에 지훈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한숨만 깊이 내쉬었다. 어차피 닦달을 한 들, 우혁의 마음은 계속 이곳에 남아있어, 편안하게 쉬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우혁이 혼자 선택하여 돌아가길 바랐던 것이다. 주군... 주군은 참으로 어리석으십니다. 지금 주군 한 명의 욕심 때문에.... 세 사람의 삶이 불행 속으로 잠겨들고 있습니다. 주군은 참으로 어리석으십니다. 벽에 기대어 성훈을 질책하는 지훈의 눈에 우혁이 무거운 걸음으로 선궁을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 풍사님.] 소연이 황급히 우혁을 맞아들였다. 방에 앉아 수라도 놓고 있었는지, 붉은 색의 고급 비단과 실 뭉치들이 놓여있었다. 물에 젖은 우혁의 모습에 놀랐는지 급히 안에 들어가 수건을 가져다 우혁에게 건넸다. [어찌하여 이리도 젖으셨습니까?] [발을 잘못 디뎌 호수에 미끄러졌다.] [물이 많이 찼을 텐데....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래.] 우혁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옷은 축축하게 젖어 조금씩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우혁이 발을 미끄러뜨려 호수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쯤은 소연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만히 우혁의 뒤를 따랐다. [곧 목욕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됐다. 찬물로 해도 되니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던 일이나 계속 해라.] 우혁은 한 손을 들어 소연의 호의를 거절하고는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걱정스런 마음으로 문밖에서 기다리던 소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쿵!!!!]하는 괴음이 들리자 화들짝 놀라며 우혁을 불렀다. [풍사님!!!!]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간 소연의 눈에 옷을 채 벗지도 못하고 욕실 바닥에 쓰러진 우혁의 모습이 들어왔다.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지만 마음을 진정시키며 우혁의 곁에 다가간 소연은 우혁이 아직 숨을 쉰다는 것에 안도하며 손으로 우혁의 매끈한 이마를 짚어보았다. 뜨거워... 우혁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보일 만큼 우혁의 체온은 높아져 있었다. 얼른 침실로 가 이불을 가져다가 우혁을 덮어준 소연은 의원을 부르러 갈만한 사람을 찾았지만, 우혁의 생활이 검소한 탓에 시중드는 사람을 한 명도 두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의원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우혁의 집엔 아직도 숨에 차 헐떡이는 소연과 우혁을 진찰하는 의원, 걱정스러운 표정의 지훈이 서 있었다. [의원. 풍사님의 상태는 어떠한가?] 의원이 진찰을 마쳤을 때 지훈이 물었다. [영양실조에 피로가 쌓인데다... 감기까지 겹쳐서 몸이 못 이긴 모양입니다.] 우혁 쯤 되는 사람이 영양실조라는 게 이상한지 의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약을 조제했으니.. 이 약과 함께 음식을 챙겨 드신다면 큰 탈 없이 병이 나을 것입니다. 하오나... 계속 이렇게 지내시다가는... 몸이 많이 상해서..........] 의원이 말끝을 흐렸다. [그래, 수고했다. 이만 돌아가거라.] 지훈이 의원의 손에 사례비를 들려주고는 옆에 있던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소연은 아직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우혁을 지켜보고 있었다. [령.. 네가 수고했구나.] [아닙니다, 운사님. 저의 지아비 되시는 분인데.... 이리 될 정도로 모르다니.... 전부... 소녀가 잘못한 탓입니다.] 소연은 아까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다, 분명 풍사가 제멋대로 고집을 피우며 돌아다닌 걸 테니...] 지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말없이 앉아서 있은지 얼마 안 되어 우혁이 뒤척거리다가 눈을 번쩍 떴다. [........여긴..........] 잠긴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옆에 지훈이 있는 것이 좀 놀라운 모양이었다. [너.... 욕실에 쓰러져 있는 거... 령이 제때에 의원을 데려와 진찰한 거야. 내가 그러게 니 몸.............] [승아님은....?] 우혁이 지훈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승아님은.. 어찌하고 여기에 온 거냐..] 지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야, 너.........] [난 괜찮으니 가서 승아님을 지켜라.] [괜찮다구? 하아~ 지금 이 꼴로 괜찮다는 말이 나오냐?] [그래. 어서 가서.....] 우혁이 말을 못 잇고 오랫동안 기침을 했다. 지훈은 반쯤 화가 난 표정으로, 반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우혁을 지켜봤다. 안타깝고 화가 난다. [난..... 괜찮으니까.. 가서 승아님을 모셔라.] [그래, 그래!! 니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너.. 한 번만 더 쓰러지면..... 가만 안 둔다.] 지훈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풍사님. 괜찮으신가요?] [그래, 령. 내가 괜한 걱정을 끼쳤구나.] [이런 거 참견하는 건 죄송하지만..... 앞으론 제가 꼬박꼬박 식사를 챙겨드리겠습니다.] [난 괜찮다. 그러니.....] [괜찮지 않습니다!!!!] 소연의 외침에 우혁은 좀 놀란 듯 했다. 늘 다소곳하던 소연이 자기주장을 강하게 펼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성훈의 총애를 받던 여자... 어떤 여자인지 깊은 관심은 없었지만 조용하고, 겸손한 여자라는 말은 자주 들어왔었다. [풍사님께서 이 결혼을 마음에 안 들어 하신다는 거.... 소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아내 된 도리로... 풍사님이 쓰러지실 때까지 챙겨드리지 않았던 전... 제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풍사님. 자꾸 이리 쓰러지시면.... 이리 힘들어 보이시면... 풍사님은 괜찮으실지 몰라도.... 풍사님의 아내인 저와.. 풍사님의 친구이신 운사님과.. 그리고....... 그리고............] 소연은 말을 할지 말지 망설였지만 곧 말을 이었다. [풍사님만을 바라보는 승아님께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 [그러니......] 우혁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소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령아.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구나. 앞으론 네가 챙겨주는 대로 하도록 하마. 그러니...... 너도 좀 쉬거라..] <23> 수빈은 잘 해나가고 있었다. 늘 예의를 갖추어 대신들을 대했고, 때로는 보는 사람을 녹여버릴 듯한 부드러운 미소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글도 몰랐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국사에 대한 것도 잘 이끌어나갔고, 우혁에게 눈을 돌리거나 매달리는 일 없어 비난할 거리가 하나도 없게 만들었다. 아직 일부에선 수빈이 출생도 모르는 여자란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지만, 예전처럼 대놓고 비꼰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궁녀들을 대할 때에도 스스럼없이 편하게 대하는 수빈의 행동은 궁녀들의 시기를 전부 눌러버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궁녀들은 더 이상 수빈을 날카롭게 찔러대진 않았다. 수빈은 상을 당한 듯 늘 하얀 옷만 입고 다녔다. 장식이라곤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눈꽃 같은 옷..... 아마 남들이 입었더라면 상을 당한 여자처럼 보였겠지만 그것을 입은 사람이 수빈이기에 수빈은 마치 선계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알 수 없는 온화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수빈은 점점 성숙해가며 아름다움이 더해갔지만 수빈의 가슴을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수빈이 내색하지 않았기에 누구도 수빈의 속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혁조차도...... 환하게 피어오르는 듯한 수빈에 비해 자꾸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우혁을 걱정하던 지훈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추억의 연못을 찾았다. 누군가 다 말라버린 풀밭에 앉아있었다. [우혁아.] 우혁이었다. 늘 수빈의 근처에서 수빈을 지키고 있더니 오랜만에 수빈의 근처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는 것 같다. [너...... 괜찮냐?] [뭐가.....] [그냥, 이것저것...] [..............] 우혁은 수빈과 성훈의 혼례 일이 다가올수록 초조해하고 있었다. 늘 여유 있던 우혁은 작은 일에도 화를 버럭 낼만큼 날카로워져 있었다. 늘 인상을 쓰고 다니며 차가운 바람을 휭휭 불어 일으키니 다들 우혁만 보면 고개를 숙이고 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수빈을 만난 후에 우혁의 미간에 있던 주름이 다 펴진 줄 알았는데 지금은 수빈을 만나기 전보다 더 깊게 패여 있다. 마치 날 때부터 그랬다는 듯이..... 지훈은 우혁의 등에 등을 맞붙여 기대어 앉았다.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둘을 스쳐지나갔다. 수빈이 왕비로 간택되고... 참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고작해야 2개월 조금 넘게 흘렀을 뿐이다. 이제 곧 연못의 물은 찬바람에서 몸을 지키려 꽁꽁 얼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연못의 물인 들... 얼어버린 우혁의 마음보다 더 차갑게 얼 수 있을까? 우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옆에 있는 말라비틀어진 풀을 잡아 뜯고 있었다. 수빈에게나 어울릴 법한 행동이지만 우혁에게도 꽤나 잘 어울린다. [괜찮지 않으면... 내가 어쩌겠어. 어차피.. 나의 감정이란 것은 쓸모없는 것인데....] 자조적인 말투... 우혁다운 말투지만 유쾌하진 않다. [그런 게 어딨냐.] [이런 걸로 너와 티격태격하고 싶지 않다. 벌써 주군의 혼례가 내일로 다가왔군. 준비는 잘 되어가는 거겠지?] [그렇겠지.] 재미없다. 언제부터 대화가 이렇게 재미없게 되었을까. 아니,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재미없게 변한 건지는 돌이켜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지만 이런 식의 무의미한 대화들은 너무 짜증이 난다.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웃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데... 아마 그건 평생을 두고 바래도 이루어지지 않을 일일 것이다. 지훈은 눈을 감고 우혁의 등으로 무게를 실었다. 우혁은 약간 허리를 굽혀 앉은 자세로 여전히 주위의 풀을 뜯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차가운 바람은 아직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못한 우혁을 질책하는 듯 계속해서 불어오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대국이라는 곳에서도 사람을 보냈고, 주변 국가인 백선국이나 신야국에서도 왕과 왕비가 직접 찾아와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수빈을 관찰하다가는 수빈과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거두어들이곤 했다. 수빈은 평소의 하얀 옷을 벗고, 화려하게 장식된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했지만 수빈의 미모에 비한다면 그 아름다움은 한낱 시든 꽃밖에 안 되었다. 수빈은 귀찮다는 듯한 심드렁한 태도로 성훈의 옆에 앉아있다가는 곧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도 잘 보여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환한 미소를 머금고는 그들의 축하를 받아들였다. 사람들의 인사가 거의 끝날 무렵, 수빈이 중얼거렸다. [지금은 웃을지도 몰라. 날 손에 넣은 것 같겠지.] [응?] 수빈과 결혼을 한단 생각에 싱글벙글 웃던 성훈이 눈을 크게 뜨고 수빈을 돌아봤다가는 흠칫하며 조금 물러앉았다. 수빈의 얼굴엔 싸늘한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마치 저승사자의 것과도 같은 미소.... [하지만... 후회하게 될 거야. 뼈저리게......] 성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지... 하지만 곧 수빈의 표정은 본래대로 돌아왔다. 언제 싸늘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돌아보는 수빈을 보며 성훈은 조금 전엔 제가 잘못 봤던 거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수빈에게서 눈을 돌렸다. [안 들어가?] 혼례를 올리는 곳 바깥 기둥에 서 있는 우혁에게 지훈이 의미 없이 물었다. 어차피 들려올 대답은 뻔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혁은 대답 없이 장검만 만지작거렸다. 밖에 오랫동안 서 있어서 우혁의 코끝이 빨갛게 시렸다. [들어가지 않을 거면.. 어디 좀 따뜻한 데라도 가 있어.] [...............] 침묵....... 답답하다. 친구가 되어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니..... 그런 지훈의 마음을 읽었는지 우혁이 돌아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슬픔을 가득 담은 그 미소가 지훈에겐 더 큰 미안함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슬픔에 잠긴 우혁에겐 지훈의 마음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우혁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승아님... 반드시... 반드시 행복하셔야 합니다. 나약한 전.... 더러운 이기심 때문에 웃는 낯으로 승아님을 축복하지 못했지만... 승아님의 환한 모습은 제게 기쁨이니... 승아님... 행복하셔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행복하셔야만 합니다. 첫눈이 내렸다. 수빈과 성훈의 혼례를 축하하려는 듯.... 소르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온 우혁은 커다란 침대에 몸을 눕혔다. 수빈과 함께 쓰려고 장만했었던 침대... 아직도 남아있는 수빈의 향기가 아리하게 우혁의 후각을 자극했다. 소연은 혼례를 도와주러 가서 집에 없었다. 적막이 흘렀다. 멀지 않은 성에서의 잔치 소리, 평민들의 축하 노래가 들리긴 했지만 우혁에겐 적막이었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우혁 자신조차도........ [승아님.......] 그리움이 흘러내렸다. 수빈과의 행복했던 시절을 향한 그리움.... 품에 안겨 자다가 아침이 되면 우혁의 품에 부비적부비적 파고들어 잠꼬대를 중얼거리던....... 아침에 우혁과 밥을 먹으며 서로의 밥그릇에 맛있는 반찬 올려주고 얼굴 쳐다보면 씩 웃던....... 날씨 맑은 날, 시간이 있을 땐 당연하다는 듯 손을 꼭 붙잡고 나들이를 가던....... 잠자기 전 키스를 하며 저녁 인사를 하던....... 그 당연했었던 일상들이 이제는 가장 큰 소망이 되어버렸다. 단 한 번만이라도, 죽기 전 단 한 번만이라도 손에 넣고 싶은 소망...... 우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을 감으면 어른거리는 수빈의 모습에 다시 손을 치우고 눈을 뜨지만 수빈의 모습은 가실 줄을 모른다. 지워지지 않는 수빈의 모습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우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한 번만 울리고 들어오면 소연이지만....... 똑똑................. 여운이 남는 소리에 우혁은 벌떡 일어났다. 제발 승아님... 승아님이 아니셔야 합니다. 지금 문 앞에 계신 것이 승아님이면.... 전 정말... 제 자신을 잃고 맙니다. 그러니 승아님... 절대... 승아님이시면 안 됩니다. 심장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문을 잡으려는 손이 떨려왔다. 숨을 크게 들이쉰 우혁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휑하니 불어오는 찬바람..... 그리고 그 앞엔............. <24> 그리고 그 앞엔 수빈이 서 있었다. 공기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으로 서 있던 수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우혁을 응시했다. 우혁은 얼어붙은 듯한 모습으로 주먹을 꼭 쥐고는 수빈을 마주 응시했다. 한동안 둘은 말없이 서로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저 그렇게 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인 듯.... 수빈의 어깨에, 머리에 눈이 내려앉고 있었다. [혁아......] 이윽고 수빈이 침묵을 깼다. 우혁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니가.. 보고 싶어서 왔어..] [...............] [니가 너무 보고 싶은 거야. 정말...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널 안 보면.. 죽을 것 같아서... 왔어..] [.....................] [나...... 추워..] 수빈의 말에 우혁이 황급히 옆으로 비켜섰다. 수빈은 예전에 살았던 집이 새삼스러운 듯 방을 한 번 둘러보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돌아가십시오, 왕비마마.] 수빈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지듯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항상 함께였을 때의 하빈을 느끼고 싶은 듯, 떨리는 손으로 침대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 약해지시면 안 되옵니다. 지금까지처럼 도도한 모습으로 절 낮추어 행동하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시면.... 저 당신을 위한 선택을 후회하게 됩니다. 제 자신을 원망하게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왕비마마.] [그렇게 부르지 마!!!!!] 수빈이 앙칼지게 외치며 벌떡 일어났다. 우혁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웃는 방법.. 예전에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이 못난 얼굴에도 억지웃음은 지을 수 있는가 보다. 마치 우는 듯한 우혁의 미소를 보기 괴로운 듯 수빈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왕비마마 같으십니다.] [날... 왕비마마라고 부르는 거.. 싫어.] [왕비마마는 이제 주군의 내실 되시는 분입니다. 제가 어찌 존귀한 이름을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구역질이 나게 싫어. 정말.. 노력해봤는데도... 구역질이 나게 싫어.]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귀하신 몸입니다. 함부로 다루시면 안 됩니다.] [이러지 마, 혁아. 응? 우리 도망가자. 같이 도망가자.] [밤이 깊었습니다. 왕비마마.] [..........정말.... 그 호칭 기분 나빠...] [죄송합니다. 왕비마마.] [너무해..... 이우혁... 정말... 정말 너무해......] 침대에 털썩 앉은 수빈의 어깨가 떨려왔다. 저 맑은 눈에서 눈물이 흐를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 조여 울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는데.... 이제는 더더욱 강해지시기를 바랐는데... 우혁은 모질어져야만 했다. 이제 수빈의 평생은 왕의 것이기에 우혁은 수빈을 모질게 뿌리쳐야만 했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좋으나 싫으나 한 나라의 왕비십니다. 그런 분이 이렇게 함부로 몸을 다루시다니요.] 혼자서 울고 있다. 몇 배는 큼직한 침대에 혼자 앉아 두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혼자 울고 있었다. 흐느낌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양이지만 때때로 절규처럼 새어나오는 흐느낌은 지켜보는 우혁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으...............흐흑.................흑.......................] 힘겹게 울었다. 목 놓아 울지도 못하고, 구슬 같은 눈물만 뚝뚝 떨구면서 입을 꼭 틀어막고 힘겹게 울고 있었다. 저 여린 몸... 가서 꼭 끌어안고 [이젠 괜찮다. 내가 있으니 걱정 마라..] 이리 속삭여주고 싶지만... 우혁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 우혁이 절대 그러지 않으리란 것을 알기에 수빈도 서글픈 설움을 이를 악물고 참아가며 애처로운 눈물을 흘리는지도 몰랐다. 혼자서 울다가 혼자 자그마한 손으로 눈물을 쓱 훔쳐낸 수빈이 몸에 납덩이라도 매단 듯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우혁을 돌아봤다. [미안해, 풍사. 내가 너무 추했지? 좀 더 좋은 모습 보였어야 하는데...... 왕비가 된 첫날부터..... 많이 피곤하지? 좀 쉬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가는 수빈... 우혁은 그런 수빈을 붙들고 싶었지만 주먹을 꽉 쥐며 수빈의 뒷모습만을 지켜보았다. 그 때였다. 문을 나서려던 수빈이 몸을 휙 돌려 우혁의 품에 안긴 것은...... [부탁이야, 혁아.. 제발... 제발 잠깐만 이러고 있어줘. 이제 다시는 안아달란 말 안 할 테니까....... 나 이런 짓 안 할 테니까....... 한 번만 이러고 있어줘. 잠시만.... 잠시만.......] 수빈이 그러지 않아도 우혁은 수빈을 내칠 수가 없었다. 수빈을 품에 안는 순간 감정이 이성을 지배해버린 것이다. 수빈에게서만 느낄 수 있었던 따뜻함... 그 따뜻함이 우혁을 온통 채워 차갑게 얼어버린 마음을 녹이고 있었다. 녹아버린 것이 눈을 통해 나오려 했지만 우혁은 입을 꼭 다물며 눈물을 참았다. 숨 막힐 듯한 감미로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슴 뛰고.... 훨씬 더 아픈 순간이었다. 하지만 후에..... 우혁이 세상을 떠나기 전 가장 그리웠던 순간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시간이 멈추길 간절히 바라고 바랐던 시간.... 이대로 멈춰 둘을 떼어놓지 못하길... 신에게 간절히 빌었던 시간....... 놓고 싶지 않아서, 다시는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우혁은 수빈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날 데리고 도망쳐, 혁아... 날... 놔두지 마.. 날 보내지 마..] [..................] [너와 함께라면... 난 어떻게 되더라도 좋아.] 우혁이 수빈의 어깨를 잡고 품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수빈의 목을 움켜쥐었다. 가느다랗고 하얀 목에 우혁의 커다란 손이 파고들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수빈의 목이 조여졌지만 우혁은 멈추지 않고 수빈의 목을 졸랐다. [난 살아있는 동안 주군께 나의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했지. 하지만 죽는다면...... 그 맹세를 지키지 않아도 돼. 널 죽이고....... 나도 죽는다.] 놀란 눈으로 우혁을 쳐다보던 수빈의 눈에 조용히 달이 떠올랐다. 수빈은 웃고 있었다. 목을 조르는 우혁보다 목이 졸리는 수빈이 훨씬 행복한 표정이었다. 목이 졸려와 숨이 막히고, 고통 때문에 괴로울 텐데도 수빈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히려 목을 조르는 우혁은 슬프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과 가슴 찢는 고통과 이 시간만 지나면 함께 할 수 있다는 행복감이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었다. 우혁의 큼직한 손에 더 세게 힘이 들어갔다.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의 우혁의 손은 아무 것도 범접하지 못한 수빈의 하얀 목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새기고 있었다. 수빈에게 느껴지는 고통을 우혁은 마치 저가 느끼듯 입을 꾹 다물고는 그 깊은 회청색의 눈동자로 수빈을 지그시 응시했다. 수빈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우혁을 가만히 쳐다봤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한참동안 폐에 신선한 공기가 닿지 않아 수빈이 조금씩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 올 때였다. [승아님!!!!!! 풍사님!!!!!!!!!! 이게 대체!!!!!!!!!] 마침 집으로 들어오던 소연이 큰 소리로 외치며 우혁의 팔을 붙잡았다. 수빈의 목을 잡고 있던 우혁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리고 자기가 한 행동을 깨닫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수빈의 앞에 털썩 무릎 꿇었다. 수빈은 갑자기 공기가 들어오자 벽에 기대어 한참동안 콜록댔다. [내... 내가........] 우혁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기의 손을 내려다봤다. 소연 역시 많이 놀란 듯 했지만 얼른 수빈의 곁으로 와서 수빈을 살폈다. 한동안 수빈의 기침소리만이 방안에 가득했다. 겨우겨우 기침을 멈춘 수빈이 몸을 똑바로 폈다. 우혁은 수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왕비마마. 괜찮으신가요?] 소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수빈이 웃는다. 서글프게 웃는다. [나 말이지... 지금 이 순간은... 니가 너무 미워.. 니가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니란 거 알지만.... 지금은....... 소연이 니가 너무 미워...] [왕비마마...] [소연아. 때론....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삶이 있는 거야. 살아있는 것이 죽느니만 못한 삶이 있는 거야. 그리고......... 지금 내 삶이 그래. 나.... 나 행복했어. 우혁이가 내 목을 졸랐지만...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어. 죽어야만 우혁이와 사랑할 수 있다면.... 난 그것을 선택하고 싶었어. 그런데... 어째서..... 날 살게 해준 거야...?] 수빈이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소연을 쳐다봤다. 슬픔과 원망, 좌절... 수빈의 눈엔 그 세 가지밖에 없었다. [하지만 왕비마마...] [그냥... 죽고 싶었어. 그냥.........] 수빈의 눈에서 또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수빈이 울며 우혁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우혁의 손을 꼭 잡는다. [나...... 기뻤어. 혁아... 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어. 비록.. 함께 도망치진 못했지만..... 나 지금 행복해. 그러니까.......] 그리고 우혁의 손을 올려 손에 입 맞춘다. 수빈의 입술이 닿자 우혁이 움찔했다. 수빈은 늘 약지 손가락을 지키고 있던 반지를 빼 우혁의 새끼손가락에 끼웠다. [널 원망하지 마. 너의 손을 탓하지 마. 이건 나의 마음이야. 그리고..... 너의 마음이기도 해. 이게 너의 손에 있는 한.... 난 행복할 거야. 오늘 일을 기억할 거야. 나..... 정말 아주 많이 행복했으니까.... 나 이제 갈게. 우린 이제 왕비와 신하의 모습으로 만나야겠지. 하지만 난... 오늘 일을 기억하며... 행복해할 거야. 오늘 니가 내게 준 것은 죽음이 아니라...... 앞으로 갖지 못할 커다란 행복이야.] 말을 마친 수빈은 천천히 일어섰다. 우혁은 아직도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승... 아니, 왕비마마. 제가.....] 소연이 황망히 다가서자 수빈이 손을 저었다. [아냐, 그냥 있어. 그냥... 우혁이 보살펴줘. 많이 괴로워할 거야.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할 거야. 그치만 소연아.. 너도 알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때가 있다는 거..... 나 정말 행복해했다는 걸... 우혁이한테 설명해줘.] 쓰러질 듯 걸어가는 수빈의 뒷모습에 소연은 가만히 눈물을 흘렸다. 어둠 속에 잠겨가는 수빈의 모습이 다시는 빛으로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안타까움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왕비마마.. 행복하기를 빌지 않겠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아파하지 않기를.... 저 간절히 빌겠습니다. <25> 수빈은 잘해나갔다. 대신들의 의견을 귀담아 들었으며 외교적인 일들도 잘 처리해 나갔다. 우혁과는 눈 한 번 마주치는 일이 없었고, 때로 마주치게 되면 간닥한 목례로 인사를 대신 했다. 모두들 우혁에 대한 수빈의 사랑이 식었구나..하며 역시 왕비란 권력은 마음까지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이제 봄이 오려 하고 있었다. 얼었던 연못은 녹았고, 나무들도 봄 맞을 준비를 하는 듯 하나 둘 푸른 잎을 내밀고 있었다. 살을 에일 듯 차가웠던 바람은 이제 많이 부드러워져서 아직도 차긴 했지만 예전처럼 날카롭진 않았다. 하지만 수빈만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성훈과 둘이 있을 때면 언제 웃었냐는 듯 차갑게 돌아오는 표정... 싸늘한 말투........ 수빈은 성훈과 결혼했지만 아직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가있다는 것을 성훈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수빈이 우혁을 쳐다보지 않아도 우혁과 몰래 만나지 않아도 우혁을 향한 수빈의 마음은 여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혼례를 올린 날, 늦게 들어온 수빈의 목에 나 있던 붉은 손가락 자국.... 사라져버린 약지손가락의 반지..... 모두 우혁과 관계된 것이라 예상했고, 그것은 맞아떨어졌다. 무슨 이유로 우혁이 수빈의 목을 졸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혁의 손가락엔 수빈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우혁이 살아있는 한은 수빈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는다. 우혁이 살아있는 한은......... [요새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군사 훈련을 시키다 온 지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요새 옆 국가인 백선국이 침략을 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건국 이래로 적휘국은 주변 국가들에 대해 쭉 평화 정책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적휘국의 부가 점점 커져만 가자 백선국에서 자꾸 적휘국을 넘봤다. 적휘국의 강한 군사력 때문에 섣불리 침입하진 못했지만 최근 강하게 군사 훈련 중이라는 소식이 들어왔다. 변방에서 크고 작은 싸움이 벌써 수차례나 있었다. [그래. 심상치 않더군.] [너도 알고 있었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눈치 챘겠지.] [어쩌냐..] [군사 훈련은 네가 하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겠고... 변방의 수비를 이전보다 세 배로 늘려야 할 것 같다. 공고를 붙여서 군사들을 모집해야겠군.] 우혁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이 나라를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예전에 이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성훈을 향한 막연한 충성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게.. 이 나라를 지켜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수빈을 만난 그 날부터.... 이 나라를 지킴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왕비마마.... 제 한 목숨 바쳐...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막무가내로 모집해봤자.. 머릿수만 채울 뿐이야.] 지훈이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말이야, 너........] 문득 고개를 들어 우혁에게 뭔가를 말하려던 지훈은 [됐다..]라고 자조적으로 말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요새 성훈은 수빈에게 푹 빠져 제대로 국사를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 성훈 대신에 수빈이 잘 해나가고 있긴 하지만 대신들의 눈엔 그것이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기저기 뿌려놓은 첩자들에게 대신들이 몰래 모임을 갖는 일이 잦아졌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대신들의 반란 정도는 그다지 두려운 일이 아니다. 어차피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우혁이니 그들이 자기들만의 힘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하루도 채 안 가 제압될 터였다. 정말 심각한 것은 우혁을 보는 성훈의 눈이었다. 우혁은 수빈과 눈이 마주치지 않고자 늘 왕과 왕비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결코 눈을 들지 않아 못 느꼈겠지만 성훈에게 반항심이 커져 성훈의 앞에서 잘 고개를 숙이지 않는 지훈의 눈에는 성훈의 눈빛이 점점 변해간다는 것이 느껴졌다. 우혁을 쳐다보던 질투와 증오의 눈빛은 오히려 혼례를 한 이후에 더 심해졌다. 그저 질투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그걸로 끝날 것 같지 않은 불안한 눈빛.... 백선국에서도, 대신들 사이에서도, 성훈에게서도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용하게 흐르고 있었다. 뭔가 일어나도 크게 일어날 것 같다. [...................] 우혁은 대답 없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혁의 깊은 눈동자가 잠시 성훈을 똑바로 응시했지만 곧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주 잠시였지만, 성훈은 우혁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아무런 원망도 담겨있지 않은 눈동자... 오히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한, 모든 것을 관철하는 눈동자..... [모... 못 들었느냐!!! 변방으로 나가라 했다.] 괜한 조바심에 다시 한 번 명령을 내렸다. 성훈의 말에 반응한 것은 지훈이었다. 잘못 들은 줄 알고 멍한 표정으로 성훈을 쳐다보던 지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주군!! 풍사는 국왕보좌관입니다. 성내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구요!! 풍사를 변방으로 보내려 하시다니요!!!] [지금 내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냐.]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훈이 변명을 하려는데 우혁이 그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주군. 신하된 제가 감히 주군의 명령을 거부하겠습니까. 기쁜 마음으로 주군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놀라움도, 원망도, 두려움도 담기지 않은 평소와 다름없는 단조로운 어조..... 하지만 수빈을 갖고자하는 욕망에 휩싸인 성훈은 우혁의 충심을 크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변방으로 가란 것은 곧 죽으라는 말... 요새 같이 백선국이 요란할 때는 특히 더 심한 곳이다. 충심에 가득 찬 우혁을 손으로 죽일 순 없지만, 어떻게 해서든 수빈과 떼어놓고 싶었다. 그래야 수빈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성훈의 머리에서 나온 짧은 생각이었다. 한 때는 영특함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성훈이 사랑 때문에 치졸해 졌다는 것보다도 친구가 변방에 나간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까운 지훈은 우혁이 몸을 돌려 왕실을 빠져나가는데도 따라 나가지 않고 성훈에게 따지고 들었다. [주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변방에 나가면 그것이 장수이던, 병졸이건 죽게 마련입니다. 진정으로 풍사를 보내시려는 겁니까? 풍사가 없는 적휘국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안 그래도 지금 대신들의 움직임이 시...............] [시끄럽다!!] 성훈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성훈은 질투 때문에 점점 치졸해지고 있었다. 지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성훈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지훈은 성훈에게 예를 표하지도 않고 훽 몸을 돌려 왕실을 빠져나왔다. [미쳤어, 이우혁!!!!!! 거길 가겠다니!!!!] 지훈이 외쳤다. 때 아닌 우혁의 변방전 출전 소식에 놀란 소연은 눈을 크게 뜨고 방 한쪽에 서서 신경이 곤두선 듯한 지훈과 이상하리만큼 침착한 우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히려 지훈이 변방전에 나가는 것처럼 크게 흥분해 있었다. [내가 주군께 다시 아뢰야겠어.] [됐다, 지훈아.] [됐다구? 뭐가 됐는데? 대체 너한테 된 건 뭔데? 넌 지금 살려는 의지조차 없잖아. 그래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변방전에 나가려는 거잖아. 나약한 자식... 슬픔이 두려워 도망치는 거냐?] [....................] 우혁은 말없이 짐을 챙겼다. [미쳤어, 다 미쳤다구. 넌 절대 못 가!!!] [난...... 이 나라와 주군께 충성을 맹세했지.] [웃기네. 주군? 니가 말하는 주군은 어떤 주군인데? 지금 주군은 사랑 때문에 미쳐서 생떼를 부리는 거라구!!] [지훈아. 불경한 소리를 입에 담지 마라.] [이우혁, 이우혁!! 제발.. 니가 없는 적휘국은 끝장이라구.] [거기 나간다고....... 꼭 죽으란 법도 없잖아.] 우혁이 웃는다. 미소가 너무 서글퍼 보여 지훈은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웃지 마!!! 지금 웃음이 나와? 젠장....] 지훈이 초조한 듯 방을 왔다갔다 했다. 우혁은 조용히 짐만 챙길 뿐이었다. 거의 챙겼을 때 지훈이 멈추며 말했다. [나도 가야겠어.] 이번에도 우혁은 웃기만 했다. [준비하고 올게.] 나가려는 지훈의 팔을 붙잡은 우혁이 가만히 지훈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넌 이곳에 남아 주군을 보필해라.] [싫어. 난 그런 주군 모시고 싶지 않아. 이 나라 따위에 충성을 바치고 싶지도 않아. 내가 지금 변방에 가려는 건... 네가 가기 때문이야. 아마 너라도 이렇게 했겠지.] [네가 충성을 맹세한 것은... 내가 아니라 주군이다.] [난 영특했던 주군께 충성을 맹세했어. 나의 친구였던 고.성.훈이란 인간한테 충성을 맹세한 거라구. 내 성격 알잖아, 누구한테 쉽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거... 난 사랑에 미친 인간한테 충성을 바치진 않아.] [벽에도 귀가 있는 법이다. 말을 가려라.] [빌어먹을!!!!!!!!!] 지훈은 우혁이 다 챙겨놓은 가방을 들어 바닥에 거세게 던져버렸다. 옷가지들이 흩어졌다. 그 모습에 소연은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우혁은 불평 않고 묵묵히 다시 짐을 챙겼다. [아무튼 나도 간다.] [지훈아. 제발.. 이곳에 남아 왕비마마를 치켜라. 요새... 이상한 움직임들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니가 더 이상 주군께 충성하지 않겠다면... 친구인 나의 부탁이니 이곳에 남아 왕비마마를 보필해라.] 간절한 우혁의 부탁에 지훈이 움직임을 멈추고 우혁을 응시했다. 변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변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데.... 곁에 그리도 아름다운 여자가 있고, 시간은 흘러가는데도 우혁의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더욱 진해졌다는 것뿐.... 수빈은 내색하지 않지만 분명 수빈의 사랑도 진해지고 있을 것이다. 지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수빈과 우혁을 싸잡아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져서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다. 소연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사지(死地)에 나가면서도 오직 단 한 생각... 수빈의 걱정뿐인 우혁을 보니 새삼 수빈을 향한 우혁의 사랑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소연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훈이 그리도 싫어하는 눅진한 침묵이 지나갔다. [알겠어. 대신에... 싸움이 끝나면 꼭 돌아와야돼. 만약... 왕비마마 같은 엄청난 분을 나한테 맡겨놓고 안 돌아오면 너... 진짜 죽여버릴 거야.] [후후.. 그래. 너 무서워서라도 돌아와야겠다.] <26> 짜악!!!!!!!!!!!!!!!!!!! 아픔보다는 놀라움이 성훈을 휩쌌다. 날 때부터 왕으로 정해져있던 성훈.... 어느 누구도 성훈을 이토록 호되게 때린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성훈의 기분이야 어쨌든 수빈은 분노의 눈으로 성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성훈은 익숙치 않은 아픔이 느껴지는 뺨을 한 손으로 잡고는 수빈을 응시했다. 수빈의 눈은 여느 때보다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이를 악 물고 성훈을 태워죽일 듯 노려보던 수빈이 이윽고 빨간 입술을 열어 말을 시작했다. [어째서 우......아니.... 풍사를 변방으로 보낸 거지?] [..........................] [대답해!!!!!!!!] 수빈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표정이었지만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난........그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말을 더듬던 성훈이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왕으로써의 위엄을 찾아 꼿꼿하게 앉아 수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최근 백선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웃기네. 백선국이네, 뭐네 핑계대지 마. 넌 단지 질투가 난 것뿐이야. 내가 우혁이만 쳐다보니까, 네 것이 될 수 없으니까.... 우혁이를 없애면 날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성훈은 인상을 찌푸리며 수빈을 응시했다. [풍사는.......] [웃겨 죽겠어, 고성훈.] 수빈이 성훈의 말을 끊으며 외쳤다. [내게서 혁이를 떨어뜨려 놓으면 나의 마음도 멀어질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단지 그런 질투심 때문에.... 한 나라의 왕이란 놈이... 자기한테 충성을 바치는 신하를 죽음에 몰아넣어? 정말 웃겨 죽겠어, 고성훈.] 수빈이 성훈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성훈의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너의 사랑은 그런 거겠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하지만 잘 들어둬, 고성훈. 우혁이에 대한 나의 마음은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 만약 다음 생애에 쥐와 고양이의 모습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난 우혁이를 사랑할 거야. 우혁이가 날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으로 생각한다 해도... 난 기쁘게 나의 몸을 내어줄 수 있어. 그것으로 우혁이의 배고픔이 가신다면...... 이게 우혁이에 대한 나의 사랑이야. 날 향한 너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뿐이야. 더러운 욕망의 찌끄러기인 집착.......] [승아.....] [내 이름은 승아가 아니라..... 현.수.빈.이야. 그리고 나 현수빈은.. 죽었다 깨어나도 너 같은 머저리는 사랑하지 않을 거야. 자.. 이제 날 죽여보시지? 잘난 왕이신 너에게 이렇게 막 말을 했잖아.] 수빈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는 성훈을 내려다봤다. 성훈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내가..... 내가..... 어찌 널 죽일 수 있겠느냐....] [그래놓고 우혁이는 잘도 죽이러 보냈지.] [변방에 나간다고 반드시 죽으란 버........] [반드시 죽으란 법 없으면 니가 나가. 어차피 니 나라잖아. 죽으란 법도 없는데 넌 왜 여기 앉아있는 거냐?] [그만......... 돌아가거라.] [말 안 해도 가려고 했어!] 수빈이 왕실 밖에 나왔을 때 주변엔 아무도 없고 지훈만이 있었다. 수빈이 씩씩거리며 왕실로 들어갈 때부터 뭔가 벌어질 거란 생각에 사람들을 모두 물렸던 것이다. 수빈이 성훈에게 한 말들은 버릇없는 말들이었지만 지훈은 통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수빈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왜 우혁이를 안 말린 거야?] [주군의 명령이셔서......] [주군, 주군, 주군, 주군!!! 그 놈의 주군 소리 좀 집어치워!!! 이제 지긋지긋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왕비마마..] [왕비마마라구? 내가 왕비마마처럼 보여?] 수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지훈을 돌아봤다. 수빈의 눈에 눈물이 모여 샘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수빈이 워낙 견고하게 막고 있는 탓에 차마 흐르지는 못하고 찰랑였다. 물기 어린 눈으로 지훈을 노려보던 수빈이 몸을 훽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난 왕비마마 따위가 아니야.] [.............] [어째서... 우혁이를 좀 더 거세게 붙잡지 못했던 거야? 왜 나한테 진작 말하지 않았던 거야?] [죄송합니다.] [그 죄송하단 소리도 집어치워!!!] [.....................] 신경쇠약에 걸린 것처럼 히스테리를 부려대는 수빈의 뒤를 묵묵히 따라가며 지훈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수빈은 울지 않으려 화를 내고 있었다. 강해 보이려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하지만 수빈의 마음이 어떤지는 지훈이 잘 알고 있었다. 방에 도착하자, 수빈은 서둘러 방문을 열었다. [편히 쉬십시오, 왕비마마.] 문이 닫히기 전, 지훈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문을 닫으려던 수빈이 다시 문을 활짝 열며 외쳤다. [편히 쉬라구? 편히 쉬라는 말이 나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너 같으면 편히 쉴 수 있어? 정말 짜증나. 이딴 나라 정말 짜증난다구!!!!] 다시 문을 쾅 닫아버렸다. 지훈은 가만히 벽에 기대었다. 수빈을 지켜달라던 우혁의 부탁.... 단지 그 부탁 때문에 이 곳에 남아있는 것이기에....... 눈을 감고 기대어 있는 지훈의 귀에 작은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얇은 유리처럼 깨어지기 쉬운 힘겨운 흐느낌......... 남들이 있는 곳에선 강한 척을 하다가 혼자가 되어버리자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수빈의 흐느낌이었다. 잡을 수 없는 우혁을 향한 가슴 아픈 흐느낌 소리에 지훈도 벽에 기대어 눈물을 흘렸다. 늘 그래왔지만....... 이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도 가슴 아파 자꾸 눈물이 흘렀다. [우혁아. 넌 나쁜 놈이다. 수빈이를 데리고 도망치지 않은 넌.... 정말 나쁜 놈이다.] [왕비마마.] 수빈이 침대에 누워 멍하니 손바닥만 쳐다보고 있을 때 소연이 찾아왔다. 소연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수빈은 일어나지 않고 고개만 돌려 소연을 쳐다봤다. [소연아.] [왕비마마.] [힘들지? 남편이 전쟁에 나가버렸잖아.] 자칫 잘못하면 비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수빈의 말엔 그런 것이 담겨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소연은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수빈의 눈은 다시 손바닥에 향하고 있었다. [저보다는..... 왕비마마께서 더......] [소연아. 넌 왕을 좋아하지? 아니, 사랑하지? 하지만...... 난 왕이 너무나 싫어. 왕이 내게 주는 사랑이 너무 부담스러워. 아니... 아니.. 증오스러워.] [왕비마마..] [소연아. 이런 말 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난........ 난..............] [왕비마마. 제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어찌 왕비마마의 심정을 모르겠습니까.] [.................네가 그리도 원하던 사랑이.... 왜 내게는 독이 되는 걸까? 어째서 사랑이란 건.. 이렇게 엇갈려버리는 걸까?] [아마도 그렇기에 더욱 값진 것이겠지요.] [..................] 수빈은 눈을 감았다. 갑자기 우혁의 미소 짓는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기억을 잃었다고 했을 때에도 웃음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부드럽게 다시 한 번 추억을 만들자고 말하던 다정했던 모습... 자고 있는 얼굴 만지작거렸더니 손목을 덥석 잡으며 사람 놀래키곤 눈을 감은 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주던 모습... 처음 우혁과 동침을 할 뻔 했던 날, 수빈이 두려워하자 괜찮다며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키스를 해주던 모습... 단도를 사왔을 때, 자기가 지켜줄 건데 단도가 왜 필요하냐며 투덜대던 모습.... 그 모든 모습들이 파노라마 영상처럼 지나갔다. 분명 행복했던 추억들임에도 불구하고 한 장면, 한 장면 생각날 때마다 칼날이 되어 가슴을 찔러와 견딜 수 없이 가슴이 아프다. 다시 잡고 싶어 추억들을 향해 손을 쭉 뻗어보지만 추억들을 수빈의 손길을 비웃으며 산산히 흩어져 버린다. 그리고 유릿조각처럼 수빈의 심장에 박혀버린다. 소연이 안타까운 얼굴로 수빈의 눈 감은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왕비마마. 저 세야이온데....]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며 세야가 들어왔다. 세야는 좀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더냐.] 수빈의 물음에 세야는 빨리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수빈과 소연의 눈치를 봤다. 수빈이 눈살을 찌푸렸다. [세야.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으십니까.] 보다 못한 소연이 가볍게 재촉했다. [저어... 폐하께서 령님을 모셔오라고......] 세야가 말끝을 흘렸다. 소연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지만 수빈은 별 감흥 없는지 같은 표정으로 세야와 소연을 돌아봤다. [그럼 다녀들 와.] 예상과는 달리 수빈이 순순히 보내주자 세야는 당황한 듯 고개를 들어 수빈을 쳐다봤지만 수빈은 눈을 다시 손바닥으로 돌린 후였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어울리지 않는 인사를 하며 물러나온 소연의 표정이 전혀 밝지 않음에 세야는 좀 놀란 듯 했다. [령님. 어째서 표정이 그리 어두우십니까?] 세야로선 왕이 다시 소연을 찾으니 소연이 분명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일단 가십시다.] <27> 소연의 성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성훈은 괴로운 표정으로 소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불쾌한 침묵이 지난 후, 성훈이 입을 열었다. [령아. 그간 잘 지냈느냐.] [네, 폐하. 폐하께서 살펴주신 덕에 잘 지냈습니다.] [그래. 풍사를 변방으로 보내어 많이 상심했겠구나.] [아닙니다, 폐하. 모든 것이 적휘국을 위한 일인 줄 아는데 어찌 제 한 몸 때문에 서운해 할 수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보는 소연의 다소곳한 모습과 자신을 낮추고 성훈을 한껏 높이는 소연의 다소곳한 말투에 마음이 동한 모양이었다. 앉아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소연의 곁에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밀어 소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연은 흠칫 했지만 성훈의 손을 뿌리치진 않았다. [령아. 일어나거라.]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성훈의 다정한 목소리... 소연은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일어났다. 성훈이 소연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오래 전 성훈과 함께 있으면 느껴지던 떨림과 성훈에게서 풍겨오는 아리한 향이 났지만 그래도 예전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이 떠나가질 않는다. 소연이 아픔을 느끼며 주먹을 꼭 쥐는 것을 모르는 성훈은 소연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천천히 소연의 입가로 손을 옮겼다. [령아. 내 오늘 널 안고 싶구나.] [.......................] 막연하게 짐작했던 말이지만 성훈의 입으로 직접 듣자 알 수 없는 감정이 몸을 휩쌌다. [이리 오거라.] 성훈이 가볍게 소연의 어깨를 끌어당기려 하자 소연은 몸을 뒤로 빼며 고개를 숙였다. [이러지 마십시오. 폐하.] 예상치 못한 소연의 거부에 성훈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그런.......] [폐하. 전 지아비가 있는 몸입니다.] [허나 풍사는 나의 신하가 아니더냐. 자고로 신하의 것은 곧 왕의 것... 어찌 네가 거부한단 말이냐.] [폐하..] [난... 난 지금 왕비 때문에 마음이 많이 심란하다. 이 심란함을 네가 달래줄 수 없겠느냐.] [폐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령아.] 소연이 고개를 들었다. 예전엔 간절히 원하던 성훈의 품... 사실 지금도 간절히 원하기는 하나, 이런 식으로 성훈에게 안겨봐야 가슴만 찢어질 뿐이다. 그리고 수빈에게 아픔이 될 뿐이다. 성훈에게 충성을 바치겠다 맹세했지만 이 한 몸 다 바쳐 성훈을 섬기겠다 다짐했지만 아무 말 없이 성훈에게 안김은 더 커다란 죄악이 될 것만 같다. 눈앞에 그토록 그리던 님이 있었건만 그 님이 자신을 그리도 원하건만 소연은 안길 수 없었다. [폐하.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제겐 지아비가 계십니다. 폐하께서 절 그분께 내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그 지아비는.... 폐하의 충성스런 신하인 풍사 아닙니까. 풍사님께선 폐하와 적휘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변방으로 나갔는데 그의 처인 절 안으려 하시다니요. 대체 어느 왕이 그런 과외를 범한단 말씀입니까. 지혜로우신 폐하께서 그런 과오를 범하신다면 후세에 길이 폐하의 존함이 욕되게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령아.] [폐하. 전 폐하의 존함이 후세에 길이길이 영광으로 빛나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래, 네 마음은 알겠다.] [폐하. 한 말씀 더 올리자면......] [...............] [어찌하여 풍사님을 변방으로 보내신 겁니까.] [백선국이 시끄럽더구나.] 소연이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폐하.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폐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선 그러셔서는 아니 되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다 하여도 끝까지 아름답게 빛나는 것입니다. 폐하의 어리석은 사랑은.... 그 아름다운 사랑을 끊어버릴 수 없사옵니다.] 소연의 말에 성훈은 놀랐는지 말도 하지 못하고 소연을 쳐다봤다. 수빈의 독설이야 늘 들어왔던 것이니 어떤 말을 듣는다 해도 놀랍진 않았지만 언제나 성훈에게 순종하던 소연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성훈에게는 말도 못 할 정도의 놀라움이었던 것이다. 소연이 뒤로 물러섰다. [폐하. 어리석은 사랑은... 아무 것도 손에 넣을 수 없사옵니다. 저 역시 어리석은 사랑을 하는 모양입니다. 폐하께 불경한 언사를 한 죄.... 죽음으로 사죄하겠습니다. 폐하. 전.... 폐하를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훈에게 절을 한 소연은 성훈이 뭐라 할 새도 없이 뒷걸음질을 쳐 성훈의 앞에서 물러났다. 휘청이며 나온 소연은 주위를 둘러봤지만 소연이 오래 있으리라 짐작한 세야는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폐하... 소연은 천천히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위엔 아름답게 핀 개나리와 진달래가 제 모습을 뽐내며 소연이 돌아봐주길 바라고 있었지만 어느 것도 소연의 걸음을 붙잡아 두질 못했다. 쓰러질 듯, 넘어질 듯... 위태롭게 걸어 집에 도착한 소연은 침대에 털썩 앉아 방을 돌아봤다. 벽에 장식처럼 걸려있는 장검이 보인다. 힘겹게 검을 빼어든 소연은 왕궁이 있는 쪽으로 무릎을 꿇었다. 가슴이 아파왔다. [폐하. 참으로.... 폐하를 사랑하였습니다. 제 숨을 바쳐 폐하의 행복을 비오니... 폐하. 바라건데.... 현명한 왕이 되시옵소서. 적휘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예로운 왕이 되시옵소서.] 불빛에 빛나던 날카로운 칼끝이 소연의 명치를 파고들었다. [허억..........] 신음소리와 함께 소연의 눈에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폐하.......] 멎어가는 숨 속에서도 간절히 원하던 사람을 부른 소연은 18살의 짧은 생애를 그렇게 마감했다. 수빈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손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얀 손바닥에서 수빈은 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약지 손가락에 남겨진 반지의 흔적을 보며, 지금 그 반지를 끼고 있을 우혁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혁이 없어도 시간은 흐른다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슬프게 느껴진다. [죽으면 안 돼, 혁아. 넌 강하니까... 그러니까...... 살아돌아올 수 있어. 그렇지?] 수빈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였다. 똑똑..... [누구냐..] [운사이옵니다.] [들어와.] 수빈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대답했다. 지훈이 들어와 수빈에게 인사를 할 때에도 수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이제는 하도 봐서 지겨울 손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왕비마마.] 이상하게 지훈의 목소리가 무겁게 들린다고 생각하며 수빈은 눈을 감았다. 제발 지훈이 하려는 말이 우혁이 죽었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길 바라며...... [령이...... 죽었습니다.] 수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지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다음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훈도 수빈의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는지 묵묵히 수빈의 옆에 서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시간을 보낸 수빈이 문득 입을 열었다. [왜.... 죽은 거지..?] [벽에 걸려있던 칼로 제 몸을 찔렀다 하옵니다.] [.................] 수빈은 또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지훈은 수빈을 혼자 남겨 놓을 수 없어 나가지 않고 그곳에 서 있었다. [지훈아.] 수빈이 이름을 불렀건만 지훈은 수빈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답을 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건....... 현실일까?]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감고 있는 수빈의 눈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하얀 볼을 타고 주르르 흐르다가는 베개에 툭 떨어져 스며들고 만다. 지훈은 가만히 눈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난... 왜 이렇게 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28> 백선국과의 관계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었다. 소연이 죽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수빈의 표정이 너무 어둡기 때문인지 대신들의 분위기는 너무도 무거웠다.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논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수빈은 삶의 낙을 전부 잃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성훈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지훈은 그런 수빈의 모습을 차마 보기 힘들어 인상을 찌푸린 채 수빈에게서 눈을 돌렸다. 성훈 역시, 제가 소연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어두운 얼굴로 대신들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은 주먹구구식의 회의를 마치려 할 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병사가 뛰어 들어왔다. [폐하!!!!!!!!!!!!!!] 병사는 싸움터에서 막 달려온 듯 피 묻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왕을 찾는 병사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지훈은 병사를 제지하려 나섰지만 수빈이 한 손을 들어 지훈을 행동을 멈추게 했다. 그저 손만 들어올리는 행동인데도 전쟁터에 있다가 온 병사에겐 수빈의 행동이 선녀의 행동처럼 보였는지 잠시 넋을 빼놓고 수빈을 쳐다봤다. 성훈은 불길해졌다. [무슨 일이냐.] [풍사님께서 전투 중 사망하셨습니다!!!!!!!!!!!!!] 병사가 절규하듯 외쳤다. 욱씬...... 수빈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좌중이 조용한 가운데 지훈이 쓰러질 듯 병사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네 놈이 죽고 싶은 게냐. 어디서 그런 허위 정보를.......] [제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이틀 꼬박 세워 달려오는 길입니다. 풍사님께선 말을 타고 직접 전투에 임하셨고, 갑작스런 적의 기습으로 인해 여섯 군데에 화살을 맞으셨지만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진영으로 돌아오셨다가 숨지셨습니다.] 지훈과 성훈은 약속한 듯 수빈을 돌아봤지만 수빈의 표정은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평온해 보였다. 잘못하면 금방이라도 폭파될 것 같은 위태로운 공기가 왕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풍사는... 고통을 많이 받다가 죽었느냐?] 수빈이 터질 것만 같은 공기를 깨뜨렸다. [아, 아닙니다! 진영에 오셔 막사에 잠시 누우셨다가 숨지셨습니다.] [그래. 시신은 잘 모셨느냐?] [네. 왕비마마. 지금 이곳으로 모셔오고 있습니다.] 수빈은 턱을 괴고 눈을 살짝 감았다. 도무지 사실 같지가 않아서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적휘국에 온 이래 경험한 것 중에 가장 꿈만 같은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접해보는 왕실의 분위기에 황망한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병사가 생각난 듯 옆에 걸린 주머니를 떼어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아.. 이것.....] 눈을 뜬 수빈이 위태롭게 내려와 병사에게서 주머니를 건네받았다. [풍사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맡기셨습니다. 반드시 왕비마마께 전해야 한다고......] [그래, 수고했다. 이만 물러가 쉬거라.] [네, 왕비마마.] 병사가 인사를 하고 물러간 후에도 불쾌한 침묵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수빈은 때가 탄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있었고, 지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벽에 기대어 서서 칼에 손을 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성훈이 우혁의 장례식 준비를 하라고 이르자, 대신들은 이 분위기에서 풀려난 것이 기쁘다는 듯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성훈이 의자에 기대었다. [풍사....] 정말로 죽을 줄은 몰랐다. 우혁이니까.... 강한 우혁이니까 당연히 살아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성훈이다. 단지 수빈과 멀리 떨어뜨려놓고 싶었던 것뿐이다. [풍사....] 성훈의 혼잣말을 들은 수빈이 벌떡 일어서며 차갑게 말했다. [이제 원대로 됐네.] 그리곤 몸을 돌려 성훈에게서 멀어졌다. 수빈이 나가는 것을 본 지훈도 서둘러 수빈의 뒤를 따라 나섰다. 이제 성훈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수빈의 걸음이 위태로웠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듯, 휘청이며 걷는 수빈의 뒤에는 예전에 우혁이 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엔 지훈이 서서 수빈을 지키고 있었다. 위태로운 수빈을 부축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지훈은 주먹을 꽉 쥐고는 수빈이 혼자 힘으로 방에 도착할 때까지 지켜봤다. 수빈의 몸에 걸쳐진 하얀 옷자락 끝이 바닥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갔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자국은 남지 않았지만 수빈이 지나간 자리를 밟을 때마다 수빈이 느끼는 것과 같은 고통이 지훈의 가슴에도 느껴졌다.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쓰라림..... 지훈은 인상을 찌푸렸다. 변방으로 나감은 곧 죽음... 우혁이 변방으로 나간다는 말을 들을 때부터 우혁의 죽음은 예상한 일이었지만 아무리 예상을 했던 들, 가슴이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찌하여 인생의 마지막을 사랑으로 가슴 아파하고, 애 태우다가 그렇게 쓰리게 가버린 건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수빈이 궁으로 들어오기 전으로 돌려 왕실의 일이건, 뭐건 간에 다 때려치우고 수빈과 하루종일 놀아주고 싶다. 그래서 수빈이 혼자 심심함을 느끼지 않고 궁으로 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이 영혼의 결합을 이루어 평생을 행복하도록...... 수빈이 방으로 들어가자, 지훈은 수빈의 방문에 기대어 섰다. 오늘은 밤을 새서 수빈의 방을 지킬 예정이다. 어쩌면 수빈이 최악의 선택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우혁을 따라 갈지도 모르기에.....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수빈이 흐느끼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와 지훈의 가슴을 후벼 팠다. 왕비마마.. 지금은 비록 왕비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몸이지만.... 내세에... 왕비마마를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루고 싶습니다. 왕비마마... 아무래도 전... 이 전투 중에 세상을 떠날 것 같습니다. 절대로... 절 따라오시면 안 됩니다. 전.. 늘 왕비마마의 곁에서 왕비마마를 지킬 것입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리할 것이니.... 설령 제가 목숨을 잃는다 해도.... 왕비마마... 절대로 다른 마음을 품으셔서는 안 됩니다. 왕비마마... 왕비마마... 왕비마마... 이 편지가 전해졌을 때에는 제가 세상에 없는 것이겠지요. 왕비마마.. 간절히 원하옵건데... 왕비마마.. 내세에서 만나게 되면... 반드시.. 왕비마마를 알아보길 바랍니다.. 그리고.. 왕비마마... 그 때에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 목숨을 바쳐 사랑합니다, 왕비마마... 부디... 행복하십시오.. 우혁의 글씨... 우혁의 성격이 그렇 듯, 곧고 깨끗한 글씨.... 수빈은 다시 한 번 소리내어 읽어봤다. [수빈아.. 지금은 비록 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지만.... 내세에... 널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루고 싶어. 빈아... 아무래도 난... 이 전투 중에 세상을 떠날 것 같아. 절대로... 날 따라오면 안 돼. 난.. 늘 너의 곁에서 널 지킬 거야.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리할 것이니... 설령 내가 목숨을 잃는다 해도.... 빈아... 절대로 다른 마음을 품으면 안 돼. 빈아, 빈아, 수빈아... 이 편지가 전해졌을 때에는 내가 세상에 없는 것이겠지. 빈아.. 간절히 원하니.... 빈아.. 내세에서 만나게 되면... 반드시.. 널 알아보게 되길 바래. 그리고.. 빈아. 그 때에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래. 내 목숨을 바쳐 사랑해, 빈아. 부디... 행복해야 돼.] 내 이름을 부르고 싶었던 거지...? 왕비마마란 딱딱한 존칭이 아니라.... 그냥 내 이름을 부르고 싶었던 거지?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뜨거운 눈물은 수빈의 창백한 볼을 타고 내려가 바닥에 떨어져 차게 식어버렸다. 행복하라구...? 바보야...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 나의 행복은 너에게서만 나오는 건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 [우욱........] 가슴이 찢어진다. 갈기갈기 찢기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수빈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우혁의 체온을 느낀지 너무 오래 됐지만 아직도 온몸에 우혁의 체취가 남아 있다.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아직도 침대 옆에 누워 수빈을 꼬옥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절실하게 느껴져 더욱 가슴이 아파온다. 느낄 수는 있지만 볼 수가 없다. [혁아.......] 손을 뻗어 예전에 우혁이 누워있던 자리쯤을 더듬어본다. 우혁의 얼굴이 있던 부분.... 목이 있던 부분... 팔이 있던 부분... 가슴이 있던 부분.... 얼굴이 있던 부분에 손을 가져가 마치 우혁의 얼굴이 있는 양 몇 번이나 쓰다듬던 수빈은 가만히 드러누워 몸을 웅크렸다. 베개가 우혁의 팔이라도 된다는 듯 가만히 머리를 기대었다. [혁아.. 내 옆에 있니? 너의 영혼... 날 보고 있니? 나... 나 너무 추하지....? 그런데.. 어떡하지...? 예쁜 모습 보이고 싶은데.... 그런데..... 보여줄 수가 없어. 가슴이 아파서... 웃을 수가 없어... 혁아.... 니가 없으면.... 난.... 난 아무 것도 아니야...] 듣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우혁이 곁에 있다고 믿고 싶었다. 영혼 같은 거, 환생 같은 거 믿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분명 존재할 거라고 간절히 간절히 믿는 수빈이었다. [혁아....] 수빈은 몸을 웅크리고 누워 밤이 지나 동이 틀 때까지 우혁의 이름을 읊조렸다. <29> 곱게 차려입은 수빈을 보며 지훈은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혼례를 올릴 때보다 훨씬 아름다운 복장을 하고, 머리를 차분히 틀어 올린 수빈의 모습은 예전에 소연이 말한 대로 하늘에서 막 지상으로 하강한 선녀를 보는 듯 아름다웠다. 아픔을 겪을 후라서 그런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저릴 듯한 그 아름다움은 세상의 어떤 미녀도 따라올 수 없을 듯 보였다. 부드러운 어깨선을 드러내며 살짝 내려온 옷은 수빈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궁 안을 걸어가던 사람들도 수빈의 모습에 놀라며 한 번 멈춰 수빈을 보고는 눈을 떼기 싫다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하얀 옷만 입던 수빈이 우혁이 죽은 이 때에 화려하게 차려입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져 지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왕비마마. 아름다우십니다.] 지훈의 칭찬에 수빈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약간의 슬픔이 묻어있는 미소.. 하지만 억지 미소처럼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뭔가를 즐거워하는 듯 하다. 수빈은 평소보다 걸음을 좀 빨리해서 왕실로 향했다. 즐거운 일을 하러 가는 어린 아이 같은 행동에 지훈은 막연한 불안함을 느꼈지만 묵묵히 수빈의 뒤를 따랐다. 왕실 앞에 도착했을 때, 지훈이 얼른 문을 열려 하자 수빈이 지훈을 제지했다. 의아한 듯 쳐다보는 지훈에게 수빈이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운사..] [네, 왕비마마.] [아니... 지훈아..] [........네.......] 지훈은 움찔했지만 뭐라 하지 않았다. [부탁이야. 정말... 부탁인데... 몇 분만 예전으로 돌아가자. 몇 분만.....] 간절한 부탁에 지훈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왔다. [그래, 수빈아.] 수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붉고 고혹적인 입술을 보노라니 갑자기 우혁이 떠올라 지훈은 가슴이 아파졌다. [지훈아. 넌.... 내가 밉지..?] [........?] [나... 나 때문에... 소연이도 죽고... 우혁이도 죽었어. 성훈이는.... 이상한 왕이 되어버렸고...... 전부.. 나 하나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 수빈은 모든 슬픔을 혼자 떠안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의 책임자인 양... 혼자 죄책감에 괴로워했을 수빈을 생각하니 물밀 듯이 동정심이 밀려와 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가만히 수빈의 손을 잡았다. [난 말이야. 널 처음 만났을 때.... 널 끌어안고 싶을 만큼 너에게 감사했다. 우혁이는 너로 인해 환하게 웃었고, 너로 인해 따뜻함을 가지고 살았거든. 마지막은 속이 썩을 만큼 가슴앓이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널 알 수 있었음에 기뻐했을 거야. 넌.... 우혁이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서.. 우혁이를 알았던 것이 후회되니?] [....아니... 아니....] [나도 마찬가지야. 그들이 죽은 건 너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죄책감 갖지 마.] 수빈이 목이 멘 듯 입을 꼭 다물고 잠시 눈물을 참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지훈아. 난... 난..... 너와 친구가 된 것이.. 너무 기뻐. 니가 아니었으면... 나.. 살아가지 못했을 거야.] [나도.. 기뻐.] 수빈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수빈의 눈엔 눈물이 가득 맺혀있었지만 수빈은 눈을 힘을 줘 눈물을 묶어 두었다. 수빈은 천천히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문은 굳게 닫힌 듯 했지만 예상 외로 쉽게 열렸다. 많은 문무백관들이 성훈의 좌우에 늘어서 있다가 수빈이 들어오자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했다. 성훈은 놀란 듯 했다. 오늘 수빈의 모습은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가는 이의 모습처럼 청초하고, 온화했으며, 온몸에서 즐거움이 풍겼다. 태양과도 같이 눈이 부신 아름다움에 성훈은 신음을 흘리며 의자에 기대었다. 대신들을 사이를 쭉 걸어 성훈의 앞까지 간 수빈은 여느 때처럼 성훈의 옆에 앉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이 으레 그러하듯 왕좌가 있는 단상 아래쪽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수빈의 행동에 당황한 성훈은 몸을 반쯤 일으켰다가는 생각을 바꿨는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뒤따라오던 지훈은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곧 늘 서던 자리로 가 수빈을 지켜봤다. 모두 숨을 죽이고 수빈을 쳐다봤다. 수빈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너무 성스러워 보여 어느 누구도 수빈의 행동을 방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잠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 수빈이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수빈의 주위에 슬픔이 스러지고 있었다. 숨을 고르며 시간을 끈 수빈은 할 말을 전부 생각했는지 천천히 입을 벌렸다. [늘 받기만 해왔기에 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 가슴 아픈 일입니다. 모두 폐하께 드리기만 하였지, 어느 누구도 남에게 주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폐하. 저 역시 사랑을 받고만 살았습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폐하. 전 이리도 받기만 하고 자랐음에도 풍사에게는 모든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심정이었습니다. 저의 심장으로 풍사가 살 수 있다면 전 제 심장을 빼어 풍사에게 주었을 것이고, 저의 행복으로 풍사가 행복할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제 행복을 풍사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수빈도 잠깐 말을 멈추곤 성훈의 반응을 살폈지만 성훈은 거동하지 않고 수빈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수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소유하려고만 하는 것은... 집착입니다, 폐하. 폐하의 집착으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또 죽었습니다. 폐하. 소유하려 하면 할수록.. 사랑은 멀어져만 가는 것입니다.] 수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절 가졌다 생각하셨습니까? 풍사가 죽었으니 이제 제가 폐하의 것이 되었다...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폐하. 전 단 한 번도 승아였던 적이 없습니다. 전... 우혁의 현.수.빈.이었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한데도... 절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수빈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성훈의 얼굴이 아픔이 떠올랐다. [폐하. 풍사는 절 놓아주려 했지만.... 전 풍사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저의 삶은 오직.... 풍사와 함께여야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풍사가 절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혼자 행복하라 했지만... 내세에 만나자 했지만.... 전... 그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그게 무슨.......] 성훈이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지만 수빈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빈의 표정엔 비장함도, 슬픔도 담겨있지 않았다. 수빈은 누군가를 보고 있는 듯 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수빈의 눈에만 보이는 누군가를........ [폐하. 흥분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은... 이미 정해진 일입니다. 사람이 공기가 없이는 살 수 없듯.... 저 역시도...... 풍사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수빈은 다시 한 번 깊이 절을 했다. 그것은 [앗!!]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품에서 하얀 단도를 꺼내든 수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도를 가슴에 찔러 넣었다. 당연히 이래야만 한다는 듯이... 이런 행동 이외에는 없다는 듯이... 모두 멍하니 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빈은 지금 그들보다 낮은 곳에 있었지만 그들은 마치 고개를 들고 수빈을 우러러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충심된 신하가 왕에게 목숨을 바치듯, 수빈이 사랑하는 이를 따라가려는 그 행동은 바보 같은 행동이라기보단 너무도 고결해보여 아무도 수빈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수빈의 주위에 신성한 막이 쳐져 있는 것 같았다. 수빈은 한동안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잠시 후, 수빈의 입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나오고 수빈의 몸이 갸우뚱 할 때에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지훈이 황급히 달려 나와 수빈의 받쳐 들었다. [수... 수빈아!!!!!!!!!!!!!!!!!!!!!!!] 지훈이 다급히 수빈의 이름을 외쳤지만 수빈은 더 이상 지훈의 부름에 대답할 수 없었다. [너... 넌........ 그렇게... 좋냐...?] 수빈의 얼굴엔 아직도 미소가 맺혀있었다. 가슴을 찌르는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게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수빈은 평화롭게 웃고 있었다. 왕궁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보여주는 편안한 미소였다. [넌......... 우혁이한테 가는 게... 그렇게 좋은 거냐....] 지훈은 눈물을 흘리며 가만히 수빈의 가슴을 얼굴을 묻었다. <30> [....ㄴ..아.... 비...ㄴ..아.... 빈아.... 야, 수빈아...] 성훈이 목소리....... 나... 아직도 살아있는 건가..? 정확하게 찌른 줄 알았는데.... [수빈아. 일어나..] 아파.... 원래... 이렇게까지 아픈 건가...? 으윽.... 너무... 아파....... 찌르는 듯한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수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 없다. [수빈아. 이제 올 때 다 됐어.] 누가... 온다는 거지...? [그만 일어나, 하루 종~~~일 자냐?] 성훈이 목소리... 뭔가.. 좀 다르다. 수빈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눈앞엔 부시도록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뿌옇게 보이는 성훈의 얼굴..... 성훈이 보였다. [고...성..훈......?] 성훈이 활짝 웃는다. [야, 왜 이렇게 못 볼 걸 본 표정을 짓냐?] 성훈이었다. 왕인 고성훈이 아니라 수빈의 친구인 고성훈.. 장난도 많고 성격도 좋은 고성훈... 수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수빈아?] 가슴이 아프다. 이 고통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이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은.... 칼로 찔렀기에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럼...... 꿈이란 말이야? 모든 것이 다 꿈..? 우혁이도, 지훈이도, 소연이도... 전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란 거야? 하아.... 난 그럼... 꿈속의 인물을 좋아한 거고...? 욱씬... 눈물이 흐를 것만 같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현실로 돌아올 수 있길 그리 바랐건만, 그것들이 전부 꿈이길 그리도 바랐건만... 우혁이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란 사실은 뼈를 깎느니보다 더 괴롭다. 금방이라도 울 듯 아파보이는 표정에 성훈이 걱정스러운 듯 수빈의 어깨를 잡았다. [수빈아, 왜 그래? 안 좋은 꿈이..........] 걱정스레 물어보던 성훈은 수빈이 신경질적으로 성훈의 손을 탁 쳐내자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수빈아..?] [내 몸에..... 손대지 마, 고성훈. 난.. 지금 널 보면서 웃을 기분이 아니야. 널... 보고 싶지 않아.] 꿈이란 건 알지만... 지금의 성훈이 얼마나 자기를 아껴주는지 알지만 그래도 성훈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라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성훈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수빈을 응시했다. [나.. 그만 가야겠어.] [아.. 잠깐.. 지금 오기로 했는데....] [보고 싶지 않아.] 수빈은 차갑게 대꾸하고는 몸을 돌렸다. 화가...... 난다. 아니.. 슬픔이다. 이건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에 대한 증오스러운 슬픔이다.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수빈의 팔목을 성훈이 꽉 붙들었다. [빈아. 걔가 너 되게 만나고 싶어 했단 말이야.] [대체 누구길래................] 짜증스럽게 대꾸하며 성훈을 돌아보던 수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왕방울만 하게 뜬 채 성훈의 뒤를 응시했다. 성훈의 뒤쪽에서 뛰어오던 사람이 점점 가까이 와 성훈의 옆에 설 때까지도 수빈은 한 조각의 숨도 쉬지 못하고 그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성훈은 갑자기 변한 수빈의 표정에 놀라 수빈의 시선이 머문 곳으로 눈을 돌렸다가는 그 사람을 보고는 반갑게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하지만 성훈은 수빈의 행동에 말을 할 수 없었다. [소연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훈의 옆을 응시하던 수빈은 튀어 오르듯이 소연에게 다가가 소연을 끌어안았다. [저... 저기요...] 소연이 당황하며 입을 열었지만 몸을 빼려하진 않았다. [소연아, 소연아... 으흑.... 소연아.]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빈의 눈물을 본 성훈이 당황하며 수빈과 소연에게 다가왔다. [저기, 수빈아. 너.. 어떻게 소연이를 알아? 소연아. 너 수빈이 알고 있었어?] [아니요, 모르는데....] 소연은 난감하다는 듯 대답하면서도 손을 들어 수빈을 안았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었고, 하나는 벙찐 표정으로 그런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연아.] [네, 언니...] 소연의 대답에 수빈이 움찔했다. 언니.... 소연은 늘 수빈을 승아님이라고 불렀었다. 한데... 언니..라니....... 소연의 대답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을 차린 수빈이 어색하게 웃으며 소연에게서 떨어졌다. [아...... 미안... 미안.. 내가... 좀 흥분했었나 봐..] [아니에요, 언니.] 소연이 밝게 대답하며 활짝 웃었다. [수빈아. 너 어떻게 소연이를 알아?] [...............꿈에서 봤거든...] [네?] 소연이 화들짝 놀라며 수빈을 쳐다봤지만 수빈은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너희 둘은.... 뭔데..?] [아... 나... 소연이랑 사귀어. 얼마 전에 소개팅 했다고 했잖아. 그 때 필이 딱 꽂혔는데... 좀 더 확실해지면 얘기해주려고 지금껏 말을 안 하고 있었지.] 성훈의 설명에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응?] 정말 다행이야, 소연아. 너... 그렇게 가슴 아픈 사랑 하더니... 이렇게... 결국엔 결실을 맺었잖아. 수빈은 소연의 손을 꼭 붙잡았다. [소연아. 정말... 정말 둘이 행복해야 돼. 절대로 헤어지지 말고... 진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랑을 해야 돼. 그래서.. 결혼도 하고... 애기도 낳고... 행복하게 살다가... 그러다가.......] 목이 메여왔다. 그냥... 이상하게 목이 메였다. 소연이 간절히 바라던 사랑을, 목숨까지 바쳐 원하던 사랑을 이렇게 이루게 되어 지금 너무 기쁜데도 목이 메여 말을 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흘린 눈물을 쓱 닦으며 수빈이 씩 웃었다. [둘이.. 예쁘게 사겨...] 그리곤 아쉽다는 듯 손을 놓아주며 몸을 돌렸다. 눈을 크게 뜨고 수빈을 멍하니 쳐다보는 소연 대신, 성훈이 다급히 수빈을 붙잡았다. [빈아. 그냥 가게?] [난... 너희 둘이 예쁘게 사랑했으면 좋겠지만... 널 용서한 건 아니야. 니가.. 너무 미워.] 소연을 대할 때와는 달리 차갑게 말한 수빈은 성훈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멈췄다. [너 말이야. 혹시..... 우혁이라고 알아?] 뜬금없는 질문에 성훈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지훈이는...?] [모르겠는데...? 누군데?] [역시.. 넌... 그들과는 인연이 아닌 모양이야.] [에..?] [나.. 그만 갈래.] 단호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수빈을 성훈은 더 이상은 붙잡지 못했다. 힘겹게 걷는 수빈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보던 소연이 문득 입을 열었다. [오빠. 수빈이 언니 말이에요.] [응?]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수빈이? 아니. 내가 알기론 없는데... 특별히 남자를 만나거나 하지도 않고....] [그런데.... 그런데요.....] 소연의 서글서글한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수빈이 언니.. 꼭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표정이었어요. 너무.. 가슴이 아픈 표정으로 나의 행복을 빌어줘서... 나... 눈물이 날 뻔 했어요.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요?] 양미간을 모은 채 소연의 말을 듣던 성훈이 가만히 소연을 끌어안았다. [니가 너무 착해서 그래. 넌 원래 남의 고통을 너의 고통처럼 생각하잖아. 그래서 그런 걸 거야.]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31>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수빈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그저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기막힌 우연... 꿈을 꾸자마자 소연을 만났다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우혁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연도 만났으니... 반드시 우혁도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수빈은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몇 년 만에 보는 듯한 느낌... 그리운 느낌이 물씬 들었다. 부엌에서 솔솔 풍겨오는 맛있는 반찬 냄새는 왕궁에서 먹었던 진수성찬보다 더욱 향기롭게 느껴졌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거실을 밟아봤다. 거실이 사라질 것만 같아 천천히 아주 조심스레 걸어 부엌까지 도착했을 때, 수빈의 어머니는 국을 맛보고 있었다. [엄마.] 수빈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불렀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어머니는 금방 뒤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 수빈이 왔어? 오늘 좀 늦게 올지 알았는데..... 성훈이가 맛있는 건 많이 사줬니?]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다가온 어머니는 수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는 것을 느꼈는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빈아. 무슨 일 있었니?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두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를 보니 그 동안 꾹 붙들어뒀던 감정의 끈이 탁 하고 끊겨버려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수빈은 [와앙..]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머니는 좀 놀란 듯 했지만 가만히 수빈의 등을 끌어안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앙....] 서럽디 서럽게 오열을 하는 수빈의 모습이 안타까워 어머니는 좀 더 세게 수빈을 안았다. 잊고 있었던 엄마의 향기가 느껴지자 수빈은 더욱 가슴이 아파왔다. 참을 수 없이 아파져 몸이 떨려왔다. 얼마나 그렇게 울었는지 모른다. 국이 끓어 넘치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수빈이 조금 진정하길 기다린 어머니는 수빈의 울음이 잦아들자 조심스레 물었다. [수빈아. 무슨 일 있었니?] [엄마... 엄마... 으으으응.... 나.. 으흑........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 우아아아아앙..... 너무.............흐윽......너무..........] [그래, 수빈아, 그래...] [엄마..... 나.... 나... 꿈을 꿨어.............. 흑..... 그...꿈에서........... 이상한 나라로 갔는데...... 거기서..........으윽.......윽.....................] 말을 하기가 괴로웠다. 우혁에 대한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칼로 찌르는 고통은 따라올 수도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다. [나.... 거기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어........ 그 사람..... 난 그 사람을 너무 사랑했.....사랑했는데..... 나쁜 놈의 고성훈이....... 고성훈이 그 사라....그 사람을..... 죽였어........... 으으윽......윽......... 죽였어...... 그래서.......... 그래서...........흑............흐윽......욱..... 나..... 자살했어... 그 사람 따라가려고..... 근데..............] 가슴이 찢어지고 있다. 산산이 찢어져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려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를 찾고, 또 찾지만 그를 찾을 수 없다. 그는... 없다. [엄마........ 그게....꿈인.......거야........욱....우욱........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윽........ 존재.....하지...........않아..........................] 기절할 것만 같은 괴로움이 가슴이 밀려들었다. 단지 그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만큼 가슴이 아프다. 이런 사랑을 하게 될지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모르는 새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그 사랑을 잃어버렸다. 엄마가 수빈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수빈은 그대로 기절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다정하게 수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침착한 목소리로 수빈의 귀에 속삭였다. [수빈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꿈에서 만날 리 없어. 분명히.. 만나게 될 거야. 언젠가는 분명히 만나게 될 테니까.... 우리 수빈이... 너무 많이 울지 마.] 따뜻한 목소리.... 오랜만에 평온해짐을 느끼며 수빈은 엄마의 품에 안긴 채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환한 햇살이 눈을 따갑게 찔렀다. 그리고 슬픔의 단도가 사정없이 심장을 쑤셔댔다. 또 우혁의 꿈을 꿨다. 하지만 이 꿈은 그다지 현실적이지도, 길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꿈속에서 우혁은 그저 가만히 서서 수빈을 응시하고 있었다. 늘 수빈만을 한 가득 담던 회청색 눈동자엔 이번에도 수빈만이 가득 담겨있었다. 우혁은 너무도 슬퍼보였고, 우혁의 눈에 비친 수빈이 모습도 너무 슬퍼보였다. 우혁이 수빈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수빈은 그 손을 잡지 못했다. 우혁은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소리쳐 우혁의 이름을 불렀지만 마치 무중력 공간인 것처럼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우혁의 뒤에서 땅이 무너져가고 있었고, 그 파괴는 우혁까지 집어삼켰다. 우혁은 어둠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며 수빈을 올려다봤다. 수빈을 바라보는 우혁의 얼굴엔 슬픈 미소가 맺혀있었다. 원망도, 분노도 담기지 않은... 그저 슬픔만을 가득 담은 미소...... 그 미소를 보며 오열을 하다가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에 눈을 뜨니 방안이었다. 옆에서 알람시계가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알람 소리를 듣는 듯 느껴졌다. 조용했던 적휘국에 비해 현실은 너무 시끄럽다. 결국은 꿈인 일에 이렇게까지 적응이 되다니... 수빈은 짜증스럽게 알람을 끄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지끈.. 머리가 아파 한 손으로 머리를 꾹 누르며 수빈은 학교에 갈 채비를 했다. 교복을 챙겨 입고 문을 여니 늘 그랬듯 성훈이 담장에 기대어 있다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든다. 어렸을 때부터 옆집에 살던 성훈은 늘 먼저 나와 집 앞에서 수빈을 기다리곤 했던 것이다. 수빈이 늦어도 재촉하는 법이 없었다. 부르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수빈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상처럼 되어 처음엔 미안해하던 수빈도 나중엔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성훈이 환한 얼굴로 인사를 하는 것을 보면 찌뿌둥한 아침의 기분이 사라지고 가벼운 기분이 되어 성훈과 등교를 했다. 한데 오늘은....... 오늘은 그런 일상이 화가 나도록 싫다. 꿈속의 성훈에게 너무 절실히 적응이 되어 버려 지금 성훈의 행동은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가식처럼 느껴져 짜증이 난다. 그리고 성훈의 얼굴을 보면.... 우혁이 미치도록 생각난다. 성훈은 수빈이 웃으며 인사해주길 기대한 듯 했지만 수빈은 인상을 찌푸리며 성훈을 쓱 스쳐지나갔다. 어제부터 자꾸 이상하게 행동하는 수빈 때문에 성훈은 좀 당황한 듯 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수빈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수빈아, 잘 잤어?] [...............] [어제 왜 그렇게 들어가 버렸어? 소연이가 너랑 얘기 많이 하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소연이한테 니 자랑 되게 많이 했거든.] [저리 비켜.] [수빈아..?] [난...........] 수빈은 성훈의 슬퍼 보이는 눈과 마주치자 성훈에게 톡 쏘아주려는 걸 그만 두고 고개를 돌렸다. [빈아, 왜 그래? 내가 소연이 얘기 늦게 해서 화난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냥 지금은... 널 보면... 화가 나. 가슴도 아프고.... 내가.... 내가 늘 누군가가 그립다고 했지?] [응...] [어제 꾼 꿈에서... 그를 만났고, 니가 그를 죽였어. 꿈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반응해서 우스워?] 수빈이 아픈 표정으로 성훈을 돌아봤다. 성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아니, 우습지 않아.] [그래. 난.... 그래서 지금 널 보고 싶지 않아. 널 보면.... 그가 미친 듯이 떠올라. 내 가슴을 몽둥이로 짓누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그저 꿈이지만.. 꿈이란 거 알지만.... 난 그가 너무 그리워. 니가 그를 죽인 꿈이.. 너무 현실처럼 느껴져서 괴로워. 나... 난 널 정말 많이 좋아하는데.... 근데.... 꿈속의 넌.. 너와 달랐어. 아마.. 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을 거야. 하지만... 그 사람 얼굴이, 이름이, 목소리가 너와 같아서... 자꾸 그 나쁜 인간을 너라고 생각해 버리게 돼. 그래서 널 보고 싶지 않아. 가슴이 아프거든.] [그럼...........] 성훈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 한동안 너와 떨어져 있을게. 하지만 수빈아. 현실의 난... 너와 너의 사랑을 떼어놓는 일.. 절대 없을 거야. 그것만은 알아줘. 내가 바라는 건.... 나의 행복이 아니라.. 너의 행복이야.] 남에게 베푸는 사랑... 꿈속의 성훈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지금은 성훈은 가지고 있었다. 늘 수빈을 먼저 챙기고, 수빈의 기분을 먼저 생각하고... 어째서 이런 성훈이 꿈속에선 그리 나쁘게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늘 뭐든 것을 가지려고만 했던 독단적인 왕.. 수빈은 슬프게 웃었다. 좀 더 밝게 웃어주고 싶지만 그런 미소가 나오질 않는다. [그래, 미안해, 성훈아. 미안해.] [수빈아, 수빈아!! 너 어제 국사 쪽지 시험 45점이래. 이제 넌 국사한테 죽었다.] 평소 수빈과 친하게 지내던 지현이 호들갑스럽게 뛰어와서 말했다. 좀 이상하다. 이런 현실이 아직 적응되지 않는다. [그래? 점수가 잘 안 나왔구나.] 수빈의 반응에 지현은 좀 놀란 듯 했다. 평소와는 다른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진짜? 아우씨!! 난 정말 국사가 싫어. 짜증나.] 라고 반응했을 텐데... 지금 수빈의 반응은.. 뭐랄까. 뭔가 너무 어른스러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수빈의 미소도 어젠 찾을 수 없었던 처음 보는 기품을 띠고 있어 생소하게 느껴진다. 수빈이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다. [수빈아.] [응?] [너 어제 무슨 일 있었냐?] [일은 무슨......] 피식 웃으며 가방을 내려놓는 모양새가 아무리 봐도 수빈과는 너무 다르다. 지현은 입을 쩍 벌리며 수빈의 옆에 앉았다. 수빈은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있는 모습이 지현에게 너무 귀하게 다가왔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귀한 인간..이란 생각을 가져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저기 있잖아, 수빈아.] [응?] 수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현을 응시했다. [너 말이야. 지금... 무슨.... 음... 왕비 같은 거 아냐?] [응?] [뭐야, 너!!! 갑자기 무서워졌어.] [내가?] [그래. 말도 없고, 뭔가.. 행동하는 것도.... 너 어제 귀부인들이랑 식사라도 한 거냐?] 수빈이 미소를 지었다. [이것 봐!! 이상하다니까.. 이 소리 없는 미소... 뭔가 무서워, 무서워. 넌 수빈이 아니지? 수빈이는 어디로 간 거냐? 수빈이를 돌려줘!!!!] 지현이 장난스레 수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일상.... 꿈속에선 아침에 일어나면 우혁이 키스해주고,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그런 것이 일상이었지만... 현실에선 이것이 일상이다. 학교에 오면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시험 못 봤다고 선생님한테 혼나고..... 그런 일상이 너무나 어색하다. 한 번만 더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그런다면 왕궁에 가지 않고 아름다운 사랑을 할 텐데.... 우혁과 행복하게 살다가 같은 집에 누워 평온하게 마지막을 장식할 텐데..... 문득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수빈은 일부러 크게 웃었다. [야, 야, 야~ 지현이 너.. 죽을래? 이거 놔!!!] 수빈이 웃으며 지현의 팔을 떼어내려 하자 이제야 좀 수빈인 것 같아서 안심이 되는지 지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리려다가 수빈이 팔을 꽉 붙잡았다. [어? 야.. 수빈아.] <32> [어? 야.. 수빈아.] [응?] 지현의 눈이 수빈의 손가락을 향해있었다. [너 반지는?] [응?] [파란 보석 반지 말이야. 한 번도 뺀 적 없었잖아.] 수빈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왼손을 들어 손가락을 살폈다. 손가락엔 반지를 꼈었다는 자국만 남아있지 반지는 온데간데없었다. 설마....... 혹시라도 그 꿈이 정말일까..하고 생각하던 수빈은 곧 자신의 허황됨을 비웃으며 말했다. [어제 성훈이랑 공원에 가서 놀다가 잃어버렸나봐. 나 요새 살이 빠져서 반지가 헐거웠었거든. 후후후후후후^0^ 살이 빠졌어, 지현아. 살이~~] [아아~!!! 얄미워!! 니가 뺄 곳이 어딨다고 더 빼냐?] 지현이 웃으며 수빈의 볼을 꼬집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모든 행동들에 의미를 두게 되는 수빈이다. 볼을 꼬집으니... 지훈을 처음 만났을 때 서로 볼을 잡아당기며 놀던 것이 떠오른다. 화가 나도록 선명하다. 꿈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차라리 흐릿하다면 잊기도 쉬웠을 텐데.... 꿈이야, 수빈아.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잊을 수 있어. 금방 잊을 거야. 한 순간의 꿈처럼........ 며칠 째 성훈과 따로 만나지 않았다. 때로 바깥을 돌아다니다보면 성훈과 소연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다른 연인들의 모습은 부럽지 않지만 소연과 성훈의 모습만은 너무 부러워서 보고 싶지 않다. 머리가 아프다. [오늘은... 정말 짜증나는 날이야.] 수빈은 중얼거리며 과자 봉지를 뜯었다. 집엔 아무도 없고, 특별히 약속도 없어서 비디오나 볼 생각으로 과자를 몇 봉지나 사왔다. 일단 TV를 틀어 여기저기 채널을 바꾸던 수빈은 뭔가에 놀란 듯 채널을 다시 뒤로 넘겼다. 그리고 숨까지 멈춘 채 그 채널을 응시했다. [[적휘국의 비밀을 풀다.]] 그 방송의 제목이었다. 방송은 막 시작한 듯 했다. 여자 아나운서와 금테 안경을 쓴 지적인 남자가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적...휘국.........] 수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거짓말...............]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믿을 수 없는 사실.... 제발 존재하길 간절히 바랬던 사실... 수빈은 과자를 옆으로 밀어놓고 방송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이번 발굴된 묘가 적휘국이란 나라의 왕의 것이란 거죠?] [그렇습니다. 그리고 적휘국이 있었던 시대와 묘가 위치하는 곳으로 미뤄보아 적휘국은 고구려의 또 다른 이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거야말로 고구려 사에 길이 남을 발견이죠.] [묘의 주인인 왕의 이름은 뭐죠?] [휘문왕이라 합니다. 고구려의 왕을 살펴보면 태조왕이 특이 오래 섭정을 해왔는데... 30년 섭정이면 오래 섭정한 것인 그 때에 거의 90년가량의 태조왕의 시대를 이상하게 여기던 학자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기록 어디에도 휘문왕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에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것이지요. 휘문왕은 태조왕이 나라를 다스리기 전 고구려, 그러니까 적휘국을 다스렸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남자는 대단한 발견이란 사실에 조금 흥분한 듯 말을 빨리 했다. [그럼.. 대체 왜 휘문왕은 기록에서 삭제된 것일까요?] [그것은 휘문왕의 과오 때문입니다.] [과오요? 많은 왕들이 큰 과오를 저질렀음에도 모두 기록에 남는데... 어째서 휘문왕만 유독...] [휘문왕의 충신들 중에 풍사란 이가 있었다 합니다. 그는 실제로 적휘국의 권력자였다고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문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어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하더군요. 풍사에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휘문왕이 그의 여자를 빼앗아 왕비로 삼은 모양입니다.] [단지 그것 때문에........?] [그 당시 적휘국은 풍사를 사랑했습니다. 게다가 휘문왕은 그 여자를 빼앗고, 풍사를 변방의 전쟁터로 내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죠. 그들은 왕을 증오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다음 왕인 태조왕이 휘문왕의 모든 기록을 삭제하라 명한 것이 아닌가 추정중입니다.] [불쌍한 왕이군요.] [그렇죠. 결국 그것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 휘문왕은 비참하게 죽었으니까요.] [아.. 휘문왕의 양쪽으로 두 개의 묘가 더 있다 하던데... 그것은 누구의 묘죠?] 남자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발견한 사내아이의 표정이었다. [그것이 바로 풍사와 운사의 묘입니다. 운사 역시 휘문왕의 충신이었다 합니다. 풍사와 아주 친한 사이라고 하더군요. 풍사의 묘에서 나온 풍예찬에서 보면... 풍사는 키가 아주 크고 굳건한 남자였다고 합니다. 성격은 단호하고 냉정해서 왕과 왕비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의 목은 가차 없이 베어냈다고 하는군요. 검 실력뿐 아니라 여러 가지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적휘국의 일은 전부 풍사가 처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합니다. 그리고 운사는.... 잘 웃는 호쾌남으로 온화한 성격 탓에 주위 사람들에게 명망이 깊었다고 합니다. 여자 관계가 꽤 복잡하긴 했지만, 특별히 아끼는 여자는 없었다고 하더군요.] [왠지 삼국지에서 관우와 조자룡 장군을 보는 듯 한데요.] [그렇죠. 하지만 유비격인 휘문왕의 인품이 그에 못 따라줬으니 그들이 이렇게 역사 속에 묻혀버린 것이겠죠.] [그럼 왕비는 어떻게 되었나요?] [풍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왕비는 다음 날 왕의 앞으로 나아가 칼로 가슴을 찔러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 때, 운사가 왕비의 아명을 부르며 왕비를 가장 먼저 바쳐든 걸로 보아 왕비가 되기 전부터 왕비와 운사가 친한 관계였다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사랑이군요. 아... 이번 발굴 때 좀 미스테리한 것이 발견되었다던데...] [네. 그건 바로 화면에 나오는 이것입니다.] 화면이 바뀌고, 화면 한 가득 채워진 그것을 보며 수빈은 벌떡 일어났다가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다시 앉았다. 반지.... 수빈이 우혁의 손에 끼워준 반지였다. 그 때보다 좀 더 낡긴 했지만 확실히 그것은 수빈의 반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빈이 끼고 있던....... [저건 반지 아닌가요?] [맞습니다. 이것은 풍사의 새끼손가락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한데 이 반지란 것이..... 그 시대의 기술이라고 보기엔 너무 정교하고, 현대적으로 조각되어 있어서 우리 학자들이 이것 때문에 많이 고민하고 있답니다. 반지를 자세히 보면 좀 낡긴 했지만 요새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반지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후후후.. 그럼 누군가 시간 여행을 해서 풍사의 손가락에 저것을 끼워줬다는 건가요?] [글쎄요. 아마도 우리가 묘를 발견하기 전, 다른 누군가가 발견을 해서 끼워주고 온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다지 신빙성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럼 휘문왕은 어떻게 죽은 거죠?] [대신들의 반란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풍사가 죽고, 왕비까지 자결을 하자 많은 이들이 휘문왕의 자질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그 때에 휘문왕의 편엔 단 한 사람.. 운사만이 서 있었다고 하더군요.] . . . . . . . . . . . . . . 여자와 남자의 대화는 계속 되었지만 수빈의 귀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화면을 가득히 채우고 있던 그 반지만이 자꾸 눈앞에서 맴돌았다.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기쁨은 우혁이 존재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고, 슬픔은 우혁이 이제 세상에 없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다. 눈물이 흘렀다. 요새 너무 자주 우는 것 같다. 하지만 자꾸 가슴이 미어져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으윽............] 슬픔이 너무 크며 고통이 되는 모양이다. 수빈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웅크렸다. 지훈아.. 너.... 그렇게 성훈이 욕하더니... 결국은 성훈이의 곁에서 죽었구나. 성훈이를 지키다 죽었구나. 우혁이가..... 우혁이가 기뻐할 거야. 분명 흐뭇해 할 거야. 찢어진다. 가슴이 산산이 찢어진다. 차라리 사람들에게 밟히고, 짓이기는 것이 오히려 아프지 않게 느껴질만큼 가슴이 찢어져 흩어진다. 우혁의 모습은 아직도 가슴속에 가득한데 지금 이 세상에 함께 하지 않음이 애절하게 가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혁아... 소연이는 환생했는데.... 넌 환생하지 않은 거니..? 그래서 요새 나의 꿈에 나타나 그렇게 슬픈 표정으로 날 쳐다본 거니? 나의 손을 잡지 못 한 거니? 하지만... 혁아.. 우리 언젠간 만날 수 있겠지? 이 시대에 못 만나더라도... 언젠간 소연이와 성훈이처럼 만나서.... 우리도 행복하게 사랑할 수 있겠지? 수빈은 천천히 손을 폈다. 약지 손가락에 남은 반지 자국.... 어째서 이런 체험을 하게 된 건지 알 수 없지만, 대체 어떻게 이런 이상한 일이 생기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우혁이 죽을 때에도 반지를 끼고 죽었다는 것이다. 우혁에게 이 반지를 끼어주며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이건 나의 마음이야. 그리고..... 너의 마음이기도 해. 이게 너의 손에 있는 한.... 난 행복할 거야. 오늘 일을 기억할 거야.] 혁아... 나 약속 지켰어. 난... 그 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어. 네가... 지금까지 그 반지를 끼고 있어서... 그래서 나 지금까지 그 일 기억하고 있어. 아주 선명하게..... 하지만... 미안해... 나.. 행복하진 않아..... 그래도.. 우리 언젠간 행복해지겠지..? 행복해지길 바랄래. 반드시... 행복해지기를.......... <33> 수빈은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쳤다. 지금까지 중에 가장 밝은 모습으로 아침을 먹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곤 집을 나왔다. 그리고 성훈의 집 문에 기대어 섰다. 행복해지자. 혁이한테 약속했으니까..... 과거의 일에 연연하지 말자. 어차피.. 고구려 시대의 일이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성훈을 기다린다. 곧 문이 열리고 성훈이 나왔다. 어두운 표정으로 집을 나오던 성훈은 수빈을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수...수빈..아....] [뭐냐, 그 반응은...? 날 피하다니...] [너... 괜찮은 거야?] [내가 뭘?] [아니, 그러니까....... 너..... 음.......] [응. 괜찮아 그동안 걱정 많이 했지? 미안해~] [아냐, 아냐.] 성훈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성훈이는.. 지금 나의 친구 성훈이지... 옛날에 자기만 알던 휘문왕이 아니야. [성훈아. 너 그거 아냐?] [뭐?] [넌 정말 왕 같은 거 될 인물이 아니야.] [뭐냐, 넌-_- 뜬금없이.....] [쿠쿡 그냥 그런 것 같아. 근데 성훈아.] [응?] [난 말이지.. 왕이 된 너보다는.. 지금의 니가 훨씬 좋아.] [야, 야.-_- 내가 무슨 왕이 된다고 그래? 지금 이 세계는 민주주의 국가라구.] [그냥.. 그럴 수도 있는 일이잖아.] 하빈이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날씨가 좋지만... 그래서 가슴이 아프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남들이 못 해봤을 끝내주는 사랑 해봤으니까...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해봤으니까... 그리고... 그 사랑한 인물이 겨우 꿈속의 인물이지만은 않으니까....... 맑은 날씨임에도 신나 보이는 수빈의 모습에 성훈은 좀 놀란 듯 했다. [훈아.] [응?] [소연이랑은 잘 지내?] [당연하지.] [너네 꼬옥!!! 결혼까지 해야 돼!!] [......//////////////.... 야, 야.. 무슨 벌써부터... 사귄지 얼마나 됐다구.] [반드시 해야 돼. 널 향한 소연이의 사랑은.. 목숨을 바친 사랑이거든. 그러니까 이번엔 니가 목숨을 바쳐서 소연이를 사랑해 줘.] 수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성훈은 씩 웃으며 수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 마. 목숨을 바쳐 소연이를 사랑할 테니까.... 너야말로.. 얼른 좋은 남자 만나야지.]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난...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그 사람은 이곳에 없거든.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다음엔 꼭 만났으면 좋겠어. 다음 생애엔...................] 일년이 흘렀다. 수능이 가까워 올수록 아이들을 모두 초조해 했지만 수빈은 그다지 초조함을 느끼지 못했다. 늘 여유 있게 느긋느긋 행동하는 수빈을 보며 아이들은 전부 수빈이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기운을 풍긴다고들 했다. 성훈도 약간 그런 것을 느끼긴 했지만 그런 행동들이 이상하게 수빈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성훈과 소연은 늘 수빈을 끼어서 함께 만났다. 소연은 수빈을 아주 잘 따랐고, 수빈도 소연을 친동생처럼 아꼈다. 그리고 성훈은 그런 수빈과 소연을 마치 아버지 같은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곤 했다. 쌀쌀한 초겨울... 수능을 얼마 안 남기고 성훈과 수빈이 함께 교실을 나갈 때였다. 후다다다닥 뛰어온 지현이 수빈의 팔을 꽉 붙들었다. [왜 그래?] [미팅 가자~!!!] [싫어.] [야, 야~ 너무 단호하게 그러지 말구!!! 우리 학교의 진정한 퀸카... 왕비마마 현수빈이 함께 가야 위신이 좀 서지 않겠냐?] [웃기네.-_- 너 말이야. 수험생이란 걸 좀 자각해라.] 옆에서 성훈이 툴툴대며 핀잔을 주자 지현이 씩 웃으며 성훈의 어깨를 꾹 찌른다. [넌 너의 공주님이랑 놀아. 괜히 수빈이 건드리지 말구.]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소리긴~!! 아무튼 수빈이는 우리가 데리고 갈 거야.] [야, 야!!!!] 당황해서 수빈을 잡으려는 성훈의 손에서 수빈을 쏙 빼낸 지현은 그 굵은 팔뚝 힘으로 수빈을 질질 끌어 데려갔다. 지현의 집에서 이런 저런 옷들로 치장을 한 수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미팅 장소에 앉아있었다. 이런 건... 아.. 진짜 적응 안 되네... 처음으로 미팅이란 것에 나온 수빈은 남자와 여자가 한 줄로 쭉 앉아서 쳐다보는 이 어색한 분위기에 어설픈 미소를 띠었다. 다들 그 유명한 왕비마마 현수빈이 누군가 싶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수빈을 주목하고 있다. [니가 현수빈이구나?] [그래.] [너 요새 유명하더라. 왕비마마라구..] 앞에 앉은 남학생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키득대며 말했다. 수빈은 괜히 불쾌해졌다. [그래?] [응. 뭐,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래. 그거 다행이구나.] 싸늘한 말투.... 수빈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저도 모르게 말투가 차가워졌다. 그냥 웃으려고 말하던 남학생은 수빈의 반응에 당황한 듯 했다. 바깥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수빈은 가방을 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지만.... 난 먼저 일어서야겠다. 왕비마마의 실체를 보니까... 생각과는 다르지? 그것이 바로 환상과 현실의 차이란다. 다들 즐겁게 놀아. 왕비마마 볼 생각 말고...] 악의를 담지 않은 말투로 또박또박 말한 수빈은 뒤로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수빈을 스쳤다. [아, 춥다.] 요샌 해가 짧아져서 7시만 되도 밤처럼 어둡다. 그래도 짧은 해 덕분에 별을 빨리 볼 수 있다. 수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네온사인의 불빛 때문에 하늘이 그다지 어두워 보이진 않는다. 적휘국에서 봤던 하늘은 새까맣고 아름다운 하늘, 별이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보석 같은 하늘이었는데 지금 하늘은 약간 붉은 기가 도는 하늘이다. 적휘국... 꿈인지, 진짜 체험인지 아직도 알 수 없는 적휘국에 다녀 온지도 벌써 1년이 자났다. 1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우혁의 얼굴을 떠나질 않는다. 호화로웠던 궁전이라던가, 수빈을 그리도 갈궈대던 대신이라던가, 목이 잘린 궁녀라던가.... 그들의 얼굴은 희미하게 잊혀져 가지만 우혁의 얼굴만은 잊혀지지 않고 또렷하게 뇌리에 박혔다. 수빈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터벅터벅 걸었다. 사람들이 바쁘게 걸으며 수빈을 스치고 지나갔다. 현대 사회의 속도 감각... 늘 빠르기만 한 현대의 속도가 수빈의 안에서 어긋나고 있었다. 수빈은 자기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현대에 존재하는 이인지, 아니면 과거에 존재했던 이인지..... 손끝이 시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수빈은 조금 걸음을 빨리 했다. 너무 느긋하게 걷다보니 10시가 넘어버린 것이다. 이상하게 적휘국에 대한 생각만 하면 시간 개념이 사라져서 아주 잠깐 생각한 것 같은데 몇 시간이나 지나가곤 했다. 집 근처 골목길에 도달한 수빈은 주변을 한 번 휘 둘러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 골목길은 가로등이 별로 없어서 너무 어둡고, 험하게 느껴진다. 터벅, 터벅......... 수빈의 발자국 소리만이 골목에 가득 찼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집이란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수빈의 눈에 벽에 기대어 서서 담배를 피고 있는 무리들이 들어왔다. 수빈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을 지나치려 했지만 그들이 수빈을 발견하고는 수빈을 붙잡았다. [여어~ 뭘 그리 바삐 가시나.] [이거 놔요.] 수빈은 팔목을 빼려 힘을 줬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징글맞게 웃으며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아파요!!!!] [놀다 가지, 왜? 예쁘게도 차려입었는데......] [늦게 들어가면 안 돼요.] [어차피 늦은 시간이라구.] [이거 놔요~!!!] 수빈이 난감해하며 팔을 빼려 흔들어댈 때였다. [다들 그 손 놔라.]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가 난 쪽을 쳐다봤다가는 [야, 야.. 그냥 가자. 그 새끼야..] 라고 서로 중얼거리며 수빈을 놓아주고 가버렸다. 어두운 골목에 덩그마니 남은 수빈은 눈을 찌푸리며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수빈이 서 있는 곳보다 더욱 어두운 곳에 두 명이 서서 수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갑자기 심하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수빈은 주먹을 꼭 쥐고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하지만 원인 모를 불안함이 수빈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자꾸..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떠나질 않는다. 강하고, 낮은 목소리.... 그 목소리는 분명.... 분명........... 수빈은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안 그랬다가는 버렸다고 생각했던 슬픔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이쪽을 쳐다보던 남자 중, 키가 큰 남자가 퉁명스레 말했다. [뭐냐, 넌... 여자가 이 시간에 그렇게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아무리 몸 팔러 다니는 여자라도 그런 식으로 다녔다가는 위험하다구.] 수빈은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들으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불안함을 떨쳐내며 그들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그리고 그와 마주서 그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그는 좀 당황한 듯 했다.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남자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냐, 나한테 뭐 할 말 있냐? 내 말 어디라도 틀린 것이.............] 그는 말을 잇지 못 했다. 수빈이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던 것이다. [우혁아!!!!!!!!] [아.......?] 그가 당황한 듯 수빈에게서 몸을 빼냈다. 수빈은 멈출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와, 정말 소리라도 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싶은 기분을 꾹꾹 억누르며 그를 쳐다봤다. 환호성을 터뜨리고만 싶다. 이 동네를 막 뛰어다니면서 [여기에 우혁이가 있어요!! 우혁이도 환생했나 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눈 앞에 있어요!!!]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우혁이다. 온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아주 오랜 세월동안 잊지 않고 기다리던.... 기다리고 또 기다려, 그리도 원하던.... 우혁이다. [우혁아.] 우혁은 여전했다. 알맞게 그을린 피부도, 깊은 생각을 담고 있는 듯한 회청색 눈동자도, 얇고 차가운 듯한 입술도... 전부 수빈의 기억 속의 우혁이었다.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 다시 한 번 우혁을 끌어안고 싶었지만 수빈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우혁을 쳐다봤다. 여기서 더 움직였다가는 우혁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환상이라도 좋다. 그냥... 이렇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쁜 수빈이었다. [우리..... 만난 적이 있었던가?] 우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목소리.... 수빈이 미소를 지었다. 우혁이 기억하지 못해도 좋다. 우혁이 알아보지 못해도 좋다. 존재하니까..... 지금 이곳에 서 있으니까...... 수빈에게서 떨어져 서 있던 우혁이 천천히 수빈에게 다가와 수빈을 내려다봤다. 주르륵....... 우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과거에.... 그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던 우혁의 눈물이 뜨겁게 흘러내렸다. [이런.........] 우혁은 당황한 듯 눈물을 쓱 닦았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을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거냐....] 뒤에 있던 지훈이 킬킬대는 소리가 들렸다. 우혁은 자꾸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수빈에게 물었다. [넌 대체... 누구냐? 어떻게 날 아는 거냐...?] [.......................] 수빈이 대답 없이 우혁을 가만히 응시했다. 우혁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는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니가 기억나지 않아. 어째서....... 널... 어디선가 많이 본 듯도 한데..... 왜.. 기억이 나지 않는 거지? 왜... 자꾸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거지?] 수빈은 혼란스러워하는 우혁의 손을 꼭 붙잡았다. 우혁의 손을 여전히 크고 단단했다. [괜찮아. 잊은 것은 조금씩 기억하면 되는 거고.. 기억이 나지 않는 추억은 다시 한 번 만들면 돼. 니가 내 곁에 있고, 내가 니 곁에 있으니까 다시 한 번 추억 만드는 것도 아주 재미있을 거야.] 수빈이 활짝 웃었다. 갑자기 적휘국에서 처음 우혁을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그 때에도 처음 보는 그곳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는 수빈에게 우혁이 따뜻한 목소리로 저렇게 말해줬었다. 우혁이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수빈을 쳐다봤다. 우혁의 눈동자에 수빈이 비쳤다. 회청색 배경을 둔 수빈의 모습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수빈을 가득 담고 있는 우혁의 모습 또한,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행복해 보였다. 2천여 년 간 품어온 그들의 사랑이 지금 결실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뒷이야기 1> [잘 잤어?] 눈을 뜨면...... 우혁이 있다. 변함 없이 다정한 미소로 따뜻하게 수빈의 아침을 장식해 준다. [으응.... 나 꿈을 꿨어.] 수빈이 칭얼대며 우혁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우혁을 다시 만난 지 벌써 8년이 지났다. 우혁이 군대에 갔을 때에도 수빈은 행복하게 우혁을 기다렸다. 천 년이 넘게 기다렸으니 2년 몇 개월쯤은 일도 아니었다. 우혁이 예쁜 반지를 선물하며 결혼하자 할 때에 수빈은 펑펑 눈물을 흘리며 청혼을 받아들였다. 천년도 넘게 기다린 사랑.... 그것의 결실이었다. [무슨 꿈을 꿨는데?] [너와... 나의... 전생...] 우혁이 웃었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랬어? 여전히..... 성훈이는 왕이고.. 널 괴롭혀?]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젠 안 그래. 이젠.... 니가 내 곁에 있어. 성훈이 곁에는 소연이가 있고...... 그리고... 우린 너무 행복해. 함께 산에도 가고, 호수에도 가.] [그랬구나.] 수빈은 손을 올려 우혁의 손을 꼭 붙잡았다. 우혁의 새끼손가락 둘레엔 하얀 자국이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반지를 낀 것 같은......... 예전에 수빈이 [여기에 반지 꼈었어?] 라고 물었을 때, 우혁은 고개를 저으며 자기도 모르겠다는 어조로 말했다. [아니, 난 반지 같은 거 안 껴. 이건.. 나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자국이래. 꼭 반지 꼈었던 것 같지?] 우혁도 모르는 새에 전생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 왔었던 것이다. [으으... 더 자고 싶다.] 수빈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기며 중얼거리자 우혁이 미소를 지으며 수빈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그만 일어나야지 오늘 지훈이 전시장에 가기로 했잖아.] 수빈은 지훈의 그림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지훈이랑 그림은 너무 안 어울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혁이 새삼 진지하게 답하며 장난스레 눈썹을 찡끗했다. 꿈만 같은 일상.... 수빈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옆에 떨어진 옷을 주어 몸에 대충 걸쳤다. 이제는 우혁이 보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다. [같이 씻을까?] 우혁이 다정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응. 대신 오늘은 물장난하지 말기야~!!!] [알겠어, 걱정 마.] [치이~ 어제도 이렇게 대답해 놓고선 막 물 뿌렸잖아.] [하지만 옷 입고 물에 젖은 넌 너무 섹시하다구!!] [전혀 답이 되지 않아!!] 수빈은 투덜대면서도 우혁의 손을 잡았다. 우혁은 절대로 수빈을 놓지 않겠다는 듯 손에 꽉 힘을 주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갑자기 수빈을 번쩍 안아들었다. [으아아~~ 야아~ 내려줘!!!] [싫어. 안고 들어갈래.] [무겁잖아.] [니가 뭐가 무거워.] 우혁이 다정하게 말하며 웃는다. 수빈도 웃었다. 때로는.... 꿈이 현실로 바뀌기도 하나 봐. 혁아. 넌 내 꿈이고.. 나의 현실이야. [어이~ 친구들. 왔냐?] [그래, 오셨다.] 우혁이 웃으며 지훈의 어깨를 툭 쳤다. 지훈은 자기 전시인데도 정장 차림이 아닌 후즐그레한 찢어진 청바지와 하얀 박스티를 입고 있었다. [여어~ 왕비마마. 납셨습니까?] 전에 우혁과 지훈을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수빈이 이상한 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이야기하자, 그걸 진지하게 듣던 지훈은 그 다음부터 수빈은 왕비마마라고 불렀다. 예전엔 그다지도 듣기 싫었던 왕비마마란 칭호가 지훈이 하니 정겹게 들리기도 하고, 장난 섞인 말에서 애정을 느낄 수도 있어 이제는 수빈도 지훈의 장난에 맞장구를 쳐준다. [그래, 운사는 전시가 잘 되어 가느냐?] [네, 왕비마마. 왕비마마께 보이기 위하여 미천한 솜씨나마 발휘해 봤으니 모쪼록 편안히 보시다가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래, 운사의 성의를 고맙게 받아들이겠다.] [황송하옵니다. 쿠쿠쿡] 지훈이 낄낄대며 수빈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성훈이랑 소연이는 왔다 갔어? 오늘 어디 가야해서 일찍 들른다고 하던데.....]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니들 도착하기 30분쯤 전에 갔어. 걔네 애기 너무 예쁘더라. 너넨 가족 계획 없냐?] [......////////////////..........] 수빈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딴청을 부리자 우혁이 웃으며 수빈을 끌어당겼다. [아직까지는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거든.] [체엣~!!! 니들은 추웅~~~분히 즐겼다구. 이제 그만 2세를 낳아 나에게 삼촌 소리 좀 듣게 해주는 게 어때?] [우리 걱정 말구!! 너나 한 여자한테 좀 정착해.] 수빈이 지훈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밉지 않게 지훈을 흘겨봤다. [대체 어떤 전시길래 주제도 안 가르쳐 주고, 책자도 안 보내주냐?] 우혁이 코트 단추를 풀며 물었다. [보면 알아.] [나 안내지 줘.] 수빈이 손을 내밀자, 지훈이 수빈의 손을 잡아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안내지 없어도.. 넌 전부 이해할 수 있어.] [뭐야, 뭐야. 난 그림과는 정말 거리가 멀다.........구.......?] 지훈이 멈춰선 곳에서 수빈이 눈을 크게 뜨며 지훈의 뒤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응시했다. [이번 전시회 이름은... 적휘국 전... 모델은 너와 우혁이, 성훈이, 소연이.. 그리고 나.... 책자 없어도.... 전부 이해할 수 있겠지?] 수빈은 울 듯한 표정으로 그림 가까이 다가갔다. 나무를 아름답게 깎아 만든 액자 안엔 적휘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살아 튀어나올 듯 생생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처음 그림은 풍사의 침대에서 눈을 뜨는 승아의 모습이었다. 홍조를 띤 승아가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리고 있었고, 풍사는 옆에서 부드럽게 웃으며 승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두 번째 그림은 지훈과 시장에 가서 단도를 고르는 승아의 모습이었다. 승아의 손엔 하얀 단도가 들려 있었다. 검은 흑진주가 박힌 아름다운 단도........ 마치 곁에서 보고 그린 듯 현실적인 그림에 수빈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빈은 숨도 조심스레 쉬며 한 점, 한 점.. 그림을 감상했다. 그러다가 어떤 그림 앞에 서자 수빈은 우뚝 멈춰서 자세히 그림을 살폈다. 승아와 왕의 혼례 때의 그림...... 승아와 왕은 귀빈들 사이에 서서 환한 얼굴로, 조금은 지친 모습으로 그들의 축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가장 중앙에 가장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수빈의 시선은 화려한 결혼식의 주인공들이 아닌 한쪽 귀퉁이를 향하고 있었다. 수빈은 눈물을 흘렸다. 그림의 한쪽 귀퉁이엔 커다란 기둥이 있었고, 그곳엔 풍사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크고 화려한 그림 속에 너무 작고 초라하게 그려져 대부분의 사람들은 찾지 못하고 넘어갈 풍사의 모습이 수빈의 눈엔 가장 선명하게 와 박혔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인데....... 정말... 너무 오래 전의 일인데....... 수빈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지금 우혁은 곁에 있는데.... 어째서 이리도 억장이 무너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갑자기 우혁을 잃을까봐 두려워졌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닐까봐... 전처럼... 죽으면 깨어나 버리는 꿈일까봐 한없이 두려워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뒤에서 묵묵히 그림을 감상하던 우혁이 수빈을 조심스레 안았다. 그리고 수빈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 수빈아. 내가 있잖아. 과거는... 지나갔어. 이제 우린... 함께야.] 따뜻한 목소리......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정말 이해가 안 갔었는데... 우혁을 만난 후론 믿을 수 없이 기쁨에 휩싸여 자주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럼 우혁은 늘 수빈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한다. [괜찮아, 수빈아. 괜찮아....] 수빈이 미소를 지었다. [응, 혁아. 니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뒷 이야기 2> 손을 올려 기둥 뒤에 서 있는 우혁의 모습을 가만히 쓸어본 수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음 그림으로 넘어갔다. 풍사가 문을 열고, 승아가.. 이제 왕비가 된 승아가 슬픈 표정으로 우혁을 쳐다보는 그림.... 그 뒤로 스러지는 어두운 밤하늘.... 그 모든 그림이 영화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풍사가 승아의 목을 조르는 장면에선 승아의 표정이 이상하리만큼 행복해 보였다. 풍사는 울 듯한 표정이었다. [힘들었을 거야. 너의 목을 조르기.......] 옆에서 우혁이 중얼거렸다. [마치.. 자기 목을 조르는 듯한 느낌이었겠지.] [하지만.. 난 행복했어. 죽으면.. 너와 함께일 수 있으니까.... 그렇게라도 너와 함께이길 바랬어.] 수빈이 중얼거렸다. 수빈은 우혁의 손을 꼭 쥐고 다음 그림으로 넘어갔다. 풍사와 운사가 서로 대화를 하는 그림... 풍사는 괴로움을 가득 안은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머리를 거머쥐고 있었고, 운사는 운사대로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풍사의 앞에 서서 풍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풍사의 괴로운 표정이 단도가 되어 수빈의 가슴을 찔러댔다. 처음으로 본 모습... 적휘국의 체험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에 수빈이 의아한 듯 지훈에게 물었다. [이건... 무슨 그림이야?] 옆에서 따라오던 지훈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전에 니가 한 체험담 중에서...... 니가 왕비가 되었을 때.... 소연이한테 너무 다정하게 대하는 우혁이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 우혁이한테 풍사라고 부르며 차갑게 대했다고 했잖아. 그 때... 우혁이 심정이 어땠을까? 때로는 우혁이처럼 우직하고, 강해 보이는 녀석들이 그런 것에는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법이지. 넌 몇 번이나 우혁이한테 [승아님] , [왕비마마.] 라고 불리며 괴로움을 받았겠지. 우혁이는 자기가 직접 너에게 [풍사..]라고 차갑게 불리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깨달았을 거야. 그리고 널 가슴 아프게 했음에.. 괴로워했겠지. 그냥... 그럴 것 같더라구. 니 말대로... 나 진짜 전생에 운사였던 모양이야. 이미지가 팍~~!!!!하고 떠오르더라구.]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풍사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넌 운사였어. 바람둥이 운사.. 어떻게 그 성격이 아직까지 지속되는지....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그 말이 딱이야, 그치?] 수빈이 장난스레 말하자 지훈이 아프지 않게 수빈의 목을 조르며 키득댔다. [널 죽이고.. 나도 죽는다아~~] 우혁이 지훈의 머리를 퍽 때리며 투덜댔다. [임마, 장난치지 마.]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적휘국의 끝자락... 승아가 자살하는 부분까지 본 수빈은 그 다음 사진에서 미소를 지었다. 현대적인 복장을 하고 우혁을 끌어안고 있는 수빈과 당황하며 눈물을 닦는 우혁...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지훈.... 미소가 떠올랐다. 성훈과 소연, 우혁과 지훈의 만남도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그림엔.... 환하게 웃고 있는 우혁과 수빈의 결혼식 때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행복..... 마지막 화폭에 담긴 것은... 바로 아름다운 행복이었다. 가만히 서서 결혼식 그림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수빈이 이윽고 몸을 돌려 지훈을 쳐다봤다. [지훈아.] [응?] [내가 깜빡하고 말 안 한 게 있는데... 나 자살하기 전에... 왕실 앞에서 너와 이야기했어.] [그래? 무슨 얘기 했는데...?] [기쁘다고... 너와 친구가 된 것이..... 네가 없었더라면.... 나 네가 없었으면... 지긋지긋한 왕궁 생활 견디지 못했을 거라구..] [짜식.. 그랬냐?] 지훈이 쑥스럽다는 듯 코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응. 근데 지훈아. 나 지금도... 너무 기뻐. 너와 친구라는 것이....] 지훈이 웃었다. [나도 그래, 수빈아. 근데.... 우혁이가 너무 무섭게 째려봐서... 멋들어지게 안아주진 못하겠다.] [됐어, 됐어. 그만 해라.] 우혁이 끼어 들었다. [거봐. 너랑 나랑 얘기하는 꼴을 못 보지? 적휘국에서의 우혁이도 이렇게 쪼잔스러웠냐?] [후후후 좀.......] [..-_-... 좀이라니.. 수빈이 너...] 우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장난이지이~~] 수빈이 애교스레 말하며 우혁에게 팔짱을 꼈다. [지훈아. 그럼 우리 이만 갈게. 그림 정말 너무 멋지다.] [나 내일부터 기자회견이랑 작품 발표 들어간다. 만약 모델들 만나게 해달라고 하면.. 나와줄 거지?] [당연하지. 이렇게 멋진 그림의 모델인데...] [그래, 그래 그럼 잘들 가고.... 전시장 좀 한가해지면... 술이나 마시자.] 지훈의 기분 좋은 배웅을 받으며 전시장을 나섰다. 12월의 날씨는 살을 에일 듯 추웠지만 우혁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마음은 훈훈하다. 우혁이 수빈의 어깨를 감싸 가까이 끌어당겼다. 우혁의 향기가 느껴졌다. 우혁과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우혁과 지훈을 성훈에게 소개시켜줬다. 그들은 금새 친해졌다.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성훈을 보며, 수빈은.... 어쩌면 적휘국에서의 성훈도 이렇게 지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왕이 될 운명이기에 어쩔 수 없이 친구를 풍사와 운사라 불러야하고, 그들의 높임을 받아야만 하는 현실이 싫어 더더욱 우혁에게서 멀어지려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사와 운사는 여전히 친한데 자기는 이제 동떨어진 인물이라고 느껴져서 그렇게 어린 아이 같은 투정으로 풍사를 괴롭혔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바리톤의 달콤한 목소리가 수빈의 청각을 자극했다. [아니, 그냥....]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차가운 공기가 그들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들은 조금도 춥지 않았다. 눈이라도 오려는지 하늘에 꾸물꾸물 구름이 몰려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수빈과 우혁을 스쳐지나갔다. 수빈을 끌어안고 걸어가던 우혁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직도 니가 어디에 속해있는지 모르겠어?] 수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젠 알겠어.] [어디에 속해있는데...?] 수빈이 걸음을 멈추고 우혁을 올려다봤다. 우혁의 회청색 눈동자는 여전히 수빈의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사라지지도 않고, 희미해지지도 않았다. 여전히 수빈의 곁에서 수빈의 행복한 모습을 잔뜩 담아내고 있었다. 이것이 꿈이던, 현실이던... 이제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수빈이 천천히 손을 들어 우혁의 볼에 가져갔다. 차가운 느낌이 전해졌다. [여기... 너에게 속해있어, 혁아. 난...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오직 이우혁 너에게 속해져 있어. 난........ 네가 있기에 존재하고, 네가 있기에 살아 숨을 쉬는 거야. 넌 나의 세계야. 나의 모든 세계.....] 우혁의 얇은 입술에 보기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우혁도 손을 들어 수빈의 볼을 만졌다. 그리고 수빈이 그리도 사랑하는 나직하고, 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너 역시.. 나의 세계야.] 왕비마마.. 간절히 원하옵건데... 왕비마마.. 내세에서 만나게 되면... 반드시.. 왕비마마를 알아보길 바랍니다.. 그리고.. 왕비마마... 그 때에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 목숨을 바쳐 사랑합니다, 왕비마마... 부디... 행복하십시오.. Ji-hoon's say 난 기억하고 있었다. 수빈이와 우혁이... 그리고 나의 전생을.........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내가 문득 나 자신에 대한 자각을 했을 때, 난 적휘국 왕의 친척이자, 적휘국의 일등 공신인 운사였지,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평범한 사내아이는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리만큼 조숙한 나는 또래 아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자랐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혼자 귀한 듯 행동하는 날 배척했다.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단련한 터라, 그들이 내게 육체적 해를 가하진 않았지만 그들은 날 피했고, 뒤에서 미친놈이라 욕했다. 난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만나야만 하는 친구는 딱 한 사람이란 것을 난 알고 있었다. 풍사.... 난 그의 사랑을 이어줘야만 했다. 내 손바닥엔 아주 진한 붉은 반점이 있었다. 적휘국에서 수빈이가 숨을 거둘 때, 수빈이의 상처를 꾹 누르고 있던 부분이었다. 수빈이의 피는 낙인처럼 나의 손바닥에 찍혀있었다. 다들 그냥 점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전생을 알지 못하는 바보 같은 것들의 생각이었다. 내 손바닥의 낙인은 2천여 년 전 죽어간 수빈이가 찍어놓은 낙인이었다. 중학교에 올라오자 아이들의 배척은 더욱 심해졌다. 내가 웬만해선 주먹을 잘 안 쓴다는 것을 알게된 녀석들은 대놓고 뒤에서 내게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들의 욕설은 내게 아무런 치명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있어 버러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씨 좋은 날... 복도를 지나가며, 그들의 욕설을 듣고 있을 때, 한 녀석의 목소리가 그들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만들 해라.] 강하고, 단호한 말투. 나직하지만 힘이 있는 말투.. 난 그것이 풍사의 목소리일 것이라 직감했고, 나의 직감은 맞아 떨어졌다. 목소리가 들린 곳엔 풍사.... 그러니까 우혁이가 교복을 입고 서 있었다. 난 분명 우혁이도 날 알아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혁이는 날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본능적으로 가득한 정의감 때문에 욕을 얻어먹는 날 도와준 것뿐이었다. 우혁이는 적휘국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아이들에게 많은 호감을 얻고 있었다. 우혁이의 절제된 행동들과 정의감, 세면서도 주먹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모습이 많은 아이들의 애정을 받게 해주었던 것 같다. 꽤 인덕을 모으고 있는 우혁이의 말이었기에 더 이상 아이들은 날 괴롭히지 않았다. 우혁이가 날 기억하지 못할 거란 것을 전혀 예상치 못한 난, 내게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 가려는 우혁이를 붙잡았다. [우혁아.] 우혁이가 돌아봤다. 깊은 회청색 눈동자.... 슬퍼 보이는 그 눈동자 안엔.... 여전히 수빈이의 모습이 가득했다. 우혁이가 날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빈이를 보고 있는 듯, 그의 눈동자엔 수빈의 잔영이 짙게 남아있었다. [왜?] [아..... 드디어 만났다.] [응?] 우혁이가 고개를 갸웃했을 때, 난 깨달았다. 우혁이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 아냐, 우혁아. 니가 하도 유명해서 만나보고 싶었거든.] 새로운 우정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21세기 우리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우혁이는 수빈이에 대해서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성격은 적휘국의 풍사와 얼마나 똑같은지... 우혁이가 전생을 기억 못하는 척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혁이는 여전히 정의로웠고, 지킬 건 지킬 줄 아는 절제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특유의 영특함으로 선생님들에게도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다. 우혁이는 나와는 달리 21세기에 아주 잘 적응하는 것 같았지만 우혁이의 눈엔 여전히 수빈이의 모습이 짙게 남아있었다. 회청빛의 눈동자에 깊이 새겨진 수빈이의 모습은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진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진한 수빈이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혁이가 수빈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혁인 정말로 수빈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우혁이와 지내며, 나 역시 21세기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고, 더 이상 아이들에게 배척받지도 않았다. 너무 평화롭게 시간이 흘러 차츰 지루하게 느껴질 무렵 TV에서 적휘국 발견에 대해 크게 떠들었다. 마침 우혁이와 함께 있던 나는 그 기자회견을 보는 우혁이의 반응을 살폈지만 우혁이는 조금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약간씩 감탄을 하며 TV를 보고 있었다. 조금은 화가 났다. 난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반드시 우혁이와 수빈이를 만나게 해 행복한 사랑을 이루게 하고 싶은데 정작 본인인 우혁이는 기억하지 못하다니..... 어쩌면 수빈이를 만난다해도, 수빈이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정말이지.. 화가 치밀어 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혁의 눈동자 안에 자리잡은 수빈이의 잔영은 나의 분노를 가라앉게 해주었다. 어쩌면.... 지금 수빈이가 환생하지 못했기에 우혁이가 수빈이의 기억을 하지 못 하는 거라고.... 괜히 수빈이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봐야 가슴만 아플 것 같아 우혁이에게서 전생의 기억을 지워버린 하늘의 배려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다. 나도........ 전생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수빈이를 사랑했던 나의 기억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수빈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우혁이가 처음 수빈이를 보고 사랑에 빠졌던 그 깊은 밤중에... 나 역시.. 수빈이란 존재에게 반해버렸다는 것을 난 우혁이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우혁이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비록 그것이 다른 종류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난 딱 우혁이를 사랑하는 것만큼 수빈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원했다. 둘의 사랑이 이루어진 것으로.. 수빈이와 우혁이를 향한 나의 사랑도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새로 이 세상에 태어나 우혁이를 만나기 전까진... 약간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 내가 먼저 수빈이를 찾아내서 수빈이와 사랑하고 싶다는... 그녀의 사랑을 받아보고 싶다는.... 하지만 그런 이기적인 생각은 우혁이를 만나, 그 눈동자에 새겨져 있는 수빈이의 모습을 보며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우혁이의 머리는 수빈이를 잊었지만 우혁이의 모든 세포들이 수빈이를 원하고 있었다. 아마... 수빈이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어느새 난 수험생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의대의 길을 포기해버린 우혁이는 요새 경찰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우혁이는 그 근방의 폭력배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잘 싸우는 녀석... 이라고....... 우혁이와 늘 붙어 다니던 나지만 나의 장래도 우혁이를 따라갈 수 없기에 나의 예술적 재능을 살려 미술 공부에 치중하고 있던 난 그 날... 오랜만에 우혁이와 만나 밤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수빈이를 만났다. 수빈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우혁이를 향한 마음 역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내 예상대로였다. 수빈이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수빈이의 몸에 배긴 우혁이에 대한 짙은 그리움의 향은 점점 짙어졌다. 우혁이는 수빈이를 기억해 내지 못했지만 수빈이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던 우혁이의 몸은 우혁이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꾸 눈물을 내보냈다. 그것이 그들의 사랑이었다. 난 끼어들 수도 없는........ 둘이 행복함에..... 나 역시 너무나 행복했다. 울고 있는 우혁이와 그런 우혁이를 달래는 수빈이를 보노라니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마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졌음에 대한 나의 기쁨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휘국 때에... 우혁이와 떨어진 절망 속에서 수빈이는 이런 이야기를 자주 중얼거렸다. 적휘국은 꿈이다. 난 현실의 사람이다. 그 땐... 수빈이의 이야기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슬픔을 완화시키기 위한 수빈이만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빈이와 새로이 만난 지금... 그 때, 수빈이가 했던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있다. 수빈이는 이 시대에 살면서 적휘국을 체험했던 것이다. 어째서 그런 일이 수빈이에게 일어난 것인지 나의 짧은 생각으론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답게 이어져 가리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문득 내려다본 나의 손엔....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자리잡고 있었던 붉은 반점이 사라지고 없었다. 난 전생이 기억나지 않는 척 했다. 수빈이에게서 듣는 적휘국의 모습이 새삼스레 내게 다가왔다. 수빈이가 말하길... 적휘국에서의 경험은 너무 아팠지만... 적휘국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했다. 우혁이 있기에....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수빈이에겐 적휘국이 아름다웠던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수빈이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수빈이가 우혁이를 따라가기 위해 망설임 없이 단도를 가슴에 찔러 넣었을 때처럼..... 수빈이의 소개로 성훈이를 만났을 때 난 성훈이의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날렸다. 내가 비록 성훈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할지라도 나의 마음 속엔 성훈이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성훈이 역시 내게 주먹을 날렸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싸웠고, 우혁의 만류로 싸움을 멈췄다. 그리고... 성훈이가 왕이 되기 전처럼.... 아주 친한 사이로 돌아갔다. 성훈이는 적휘국의 왕이었을 때와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남을 배려할 줄 알았고, 남에게 사랑을 주었으며 감정이 풍부했고, 아주 겸손했다. 그것은 목숨을 바쳐 성훈이의 행복을 바란 소연이의 희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성훈이와 소연이는 결혼을 해 귀여운 아이를 낳았고, 우혁이와 수빈이 역시 행복한 신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난 작품전을 위해 준비중이었는데, 우혁이와 수빈이에 대한 우정의 선물로 적휘국 전이란 전시회를 열고 싶었다. 전생의 모습들.... 그 모습들을 가득 담은 수채화를 보며 우혁이와 수빈이가 느낄 기분이 행복하길 바랐다. 그림을 그리기 전, 눈을 감으면... 아주 많은 영상들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하루 전에 겪은 일인 것마냥 선명하게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은 가슴 쓰리게 아픈 것들도 많았지만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들 또한 많았다. 난 붓을 들었다. 내게 전생의 기억이 남은 것은 우혁이와 수빈이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해, 그리고... 적휘국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라고 생각하며........... 우혁이를 사랑했기에 우혁이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이 행복했고, 수빈이를 사랑했기에 수빈이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난 아주 행복했다. 나에겐 그들의 사랑이 있었고, 또 나의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림이 있었다. 행복................. 좋은 친구가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어찌 행복하지 아니하다 말 할 수 있겠는가. 난 그들이 있었기에... 행복하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태어난다면..... 전생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다.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